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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억울한 이 모이는 곳'···대법 정문 회견 택한 양승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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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9월 24일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퇴임하는 모습. [중앙포토]

2017년 9월 24일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퇴임하는 모습. [중앙포토]

서초구 대법원 정문 앞에서 신고된 시위와 집회를 담당했던 한 경찰관은 대법원 정문을 "우리나라에서 가장 억울한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라고 했다. 돌이킬 수 없는 최종심인 대법원 판결을 승복할 수 없지만 "다른 방법이 없는 시민들이 목소리를 내고 억울함을 표출하는 곳"이라 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 11일 대법원 앞에서 기자회견 #'유죄 추정의 원칙' 검찰 포토라인 거부 계획 #대법원 정문은 '억울한 판결' 호소하던 자들의 광장 #'검찰 권위 인정하지 않겠다'는 특권의식 비판도

그런 대법원의 정문에서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11일 기자회견을 연다. 그가 12년간 대법관이자 대법원장으로 매일 전용차에 앉아 지나쳤던 곳이다. 아직 변호인단과 대법원 사이의 의견이 조율되지 않아 정문의 안 또는 밖이 될지는 결정되지 않았다.

양 전 원장은 이날 오전 9시 기자회견을 연 뒤 길 건너편에 있는 서울중앙지검에 '사법 행정권 남용 의혹' 피의자로 출석한다. 검찰은 대통령급 예우를 갖춘 포토라인을 마련했다. 하지만 양 전 원장 측은 "검찰 포토라인에선 아무말도 하지 않을 계획"이라 했다.

법조계와 시민 사회에선 사법부의 전직 수장이 대법원 정문에서 기자회견을 여는 것 자체가 아이러니라고 했다. 대법원 정문 앞은 그가 평생 몸 담았던 법원의 판결을 인정하지 않고 규탄했던 시민들이 목소리를 냈던 곳이기 때문이다.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중 유일한 생존자인 이춘식 씨가 지난해 10월 대법원 정문 앞에서 일제 강제징용 손해배상청구 소송 재상고심 대법원 전원합의체에서 승소 판결을 받고 기자회견 하던 중 눈물을 흘리고 있다. [연합뉴스]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중 유일한 생존자인 이춘식 씨가 지난해 10월 대법원 정문 앞에서 일제 강제징용 손해배상청구 소송 재상고심 대법원 전원합의체에서 승소 판결을 받고 기자회견 하던 중 눈물을 흘리고 있다. [연합뉴스]

특히 2017년 초 법관 블랙리스트 의혹이 터져나오고 재판거래 의혹이 불거진 뒤에는 대법원 정문 앞에서 '양승태 대법원'을 규탄하는 집회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지난해 6월 대법원 앞에서 양 전 원장을 비판했던 한상희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양 전 원장은 아직도 국민보다 법원에 하고 싶은 말이 많이 남은 것 같다"고 했다. 또한 "양 전 원장이 검찰의 포토라인을 거부하는 것도 검찰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지난해 11월 특별재판부 설치 필요성을 주장하며 대법원 정문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던 박주민 더불어민주당 의원도 "양 전 원장이 자신의 입장에 동조하는 판사들에게 건재함을 보여주고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것 같아 부당하다"고 했다.

하지만 양 전 원장의 선택을 두고 '특권 의식'이라 비판하는 것은 지나치다는 주장도 있다. '무죄 추정의 원칙'을 무시하는 검찰 포토라인은 이제 사라질 때가 됐다는 것이다.

지난해 3월 14일 서울중앙지검에 출석하기에 앞서 이명박 전 대통령이 포토라인 앞에서 입장을 밝히고 있다.[중앙포토]

지난해 3월 14일 서울중앙지검에 출석하기에 앞서 이명박 전 대통령이 포토라인 앞에서 입장을 밝히고 있다.[중앙포토]

원로 헌법학자인 허영 경희대 석좌교수는 "우리 헌법의 대원칙이 무죄추정의 원칙"이라며 "어떤 피의자일지라도 검찰 포토라인에 세워 죄인처럼 몰아붙이는 것 자체가 헌법을 위배하는 것"이라 했다.

양승태 대법원 시절 상고 법원을 반대해 대법원과 관계가 악화됐던 김현 대한변호사협회 회장도 "검찰 포토라인에 서는 순간 피의자는 국민에게 사실상 유죄 판결을 받게된다"며 "어떤 피의자라도 자신이 원하는 장소에서 입장을 밝힐 선택권이 있고 양 전 원장도 예외가 아니다"고 지적했다.

양 전 원장의 기자회견이 사법부에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시도란 주장에 대해 김 회장은 "판사들이 그런 것을 부담스럽게 생각하는 시대는 이제 지났다고 본다"고 말했다.

양 전 원장이 퇴임 후 입장을 밝히는 것은 지난해 6월 1일 자택 기자회견 후 224일 만이다. 당시 양 전 원장은 "재판은 신성한 것이며 그것을 그렇게 함부로 폄하하는 것을 견딜 수가 없다"고 했다. 하지만 그때와 지금의 상황은 많이 다르다. 그의 손발이었던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은 구속기소돼 재판을 받고 있다.

양 전 원장은 2011년 대법원장 취임사에서  "재판은 충실하고 완벽한 심리절차를 거쳐 한번으로 결론내려지는 것이 원칙이 되어야 하는데 패소한 사람들은 3단계의 절차를 거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여긴다"며 판결 불복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나타냈다.  그런 그가 시민들이 억울한 판결을 규탄했던 대법원 정문 앞에서 어떤 입장을 밝힐지에 관심이 쏠린다.

박태인 기자 park.tae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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