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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유고시장에 진출한 국산 오디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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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이 하이파이 어떻습니까?』『아, 셔우드라고 잘 알려진 브랜드죠. 그런 만큼 다른 브랜드보다 좀 비쌉니다. 보십시오. 여기 이 피셔(FISHER)가 9백 마르크인데 셔우드는 1천1백60마르크 아닙니까. 여기선그 정도면 값이 비싼 수준이라 우리 상점에선 한달에 한 4∼5세트 정도밖엔 나가지 않지요.』
『이 셔우드, 어느 나라 제품입니까?』
『…글쎄요. 잘 모르겠지만 아마 미국산 일걸요』
외환사정이 그렇게 풍족하지는 못한 슬로베니아 공화국에는 두 종류의 상점이 있다.
자국 화폐인 디나르로 물건을 살 수 있는 상점과 외국 화폐 중에서 서독 마르크·달러 등 강세 통화를 내야만 물건을 살 수 있는 이른바 강세통화 상점(hard currency shop)이 그것이다.
슬로베니아의 가장 큰 무역회사 가운데 하나인 에모나 사도 현재 유고슬라비아 연방 전역에 4O여개의 강세통화 상점을 운영하고 있고, 그런 상점을 통해 오디오·비디오·가전제품·술·담배·의류·스포츠 용품·잡화 등 외국에서 수입한 상품들을 팔고 있다.
외환사정 때문에 디나르화와 외화와의 교환이 거의 막혀 있는 경제 상황이니 만큼 귀한 외화를 주고 수입한 상품들은 외화를 받고 팔아야 계속 장사를 꾸려가기에 유리한 것이다.
슬로베니아의 수도 류블랴나시 번화가에 널찍하게 자리잡고 있는 에모나 사의 한 강세통화 상점에 기자가 들렀을 때 오디오 코너를 맡고 있던 점원 「로만·슬레코벡」씨는 자신이 팔고 있는 하이파이 셔우드가 어느 나라 제품인지 끝내 명쾌하게 설명하지 못했다.
장소를 바꿔 서독 프랑크푸르트시 동부의 카알벤츠가에는 서독 유수의 운송회사인 단자스 사의 대규모 보세창고가 하나 있다.
삼성·금호·주 인켈 등의 한국 기업들이 이곳 단자스 보세 창고로선 무시못할 큰 고객들이다.

<일종의 외상매출>
창고 안으로 들어서면 삼성전자의 VCR등이 들어있는 박스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고, 한쪽 옆에는 셔우드 브랜드의 오디오들이 주 인켈의 오디오들과 함께 쌓여 있다.
류블랴나시의 에모나 강세통화 상점에서 달리고 있는 셔우드 하이파이는 바로 단자스 보세창고에 쌓여있던 것들로, 셔우드는 에모나사 점원의 추측처럼 미국산이 아니라 한국의 오디오 메이커 주 인켈의 고유 브랜드인 것이다..
셔우드가 유고슬라비아에 진출하게 된 내력을 우리는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외환사정이 좋지 못한 사회주의 국가의 시장을 뚫는 특이한 형태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인켈이 셔우드를 에모나사에 파는 형태는 이른바 재고판매 ( stock sale)라는 것이다.
수입 신용장을 받고 물건을 실어보낸 뒤 대금을 결제 받는 일반적인 무역거래가 아니라 신용장 없이 일단 상대방을 믿고 물건부터 보낸 후 팔리는 실적에 따라 그때그때 대금을 회수하는 방식이다.
말하자면 외상에 의한 위탁판매나 다름없는 것인데, 이는 말할 것도 없이 거래 상대방의 외환사정이 풍족하지가 못하기 때문에 생겨난 거래형태다.
동구 사회주의 국가들은 어느 나라나 일반적으로 정부로부터 수입 허가를 받아내는 일이 매우 어렵다.
대부분의 나라가 대외 무역을 하고 있는 국영 기업체에 대해 수출을 해서 벌어들인 외화의 범위내에서만 수입허가를 내주고 있으며, 따라서 수입용 외화가 모자라다보니 재고판매와 같은 외상거래 형태도 종종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지난 86년말에 처음으로 유럽 지사를 설치한 인켈이 에모나사와 접촉한 것은 87년 8월의 베를린 전자전에서였다.
에모나사는 서구 사회에선 꽤 이름과 신용이 알려진 무역상이었고, 이때 에모나 측이 제시한 재고판매 형태의 거래를 인켈측은 서독은행의 지급보증을 거는 조건으로 수락, 87년 말에 처음으로 셔우드 2백조를 인도했다.
결과는 그런대로 만족할만 했다. 약 15만 달러의 물품 대금은 3개월만에 다 회수되었으며, 그 같은 신용을 바탕으로 지난 해에는 모두 65만달러 어치의 셔우드 하이파이를 유고에서 팔 수가 있었다.
인켈과의 거래를 직접 담당해오고 있는 에모나의 「울차르·요제」국장은 인켈과 성사시킨 재고판매거래에 대해 상당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유고슬라비아의 6개 공화국 중 슬로베니아는 전체 수출의 약30%를 점유하고 있으므로 구매력이 매우 높다. 우리는 한국 기업들이 슬로베니아에서의 재고판매에 대해 더 많은 관심과 이해를 갖기 바란다.한국 기업들이 프랑크푸르트 등지에 재고를 더 많이 늘린다면 그만큼 판로를 넓힐 기회가 더 많아질 것이다. 우리는 올해 인켈의 유럽지사와 함께 대대적인 셔우드 판촉행사를 벌여 판매량을 지난해의 두배인 약1백만달러 이상까지 끌어올릴 계획이다』
꼭 울차르 씨의 지적만이 아니더라도 한국기업들은 최근 유고슬라비아가 추진하고 있는 경제개혁을 주의해서 볼 필요가 있다.
예컨대 유고슬라비아는 국제통화기금(IMF) 의 권고를 받아들여 지난해 5월28일자로 전체 생산품목의 60%에 해당하는 품목에 대해 지금까지 실시해오던 정부의 직접 가격통제를 풀었다.

<3개월만에 결제>
이중 46%는 완전히 통제가 풀려 글자 그대로 그때 그때의 시장가격이 매겨지게 되었고, 14%는 가격변동 30일전에 정부에 통보만 하면 되게 되어 있다.
유고슬라비아가 지난해 5월 IMF와 새로 맺은 스탠드바이 협정은 가격·수입·외환부문의 자유화 추진과 함께 임금인상·은행여신·재정지출의 허리띠를 졸라 맨다는 것이었는데, 그 같은 철저히 자본주의적인 경제 개혁 프로그램을 받아들인 결과 유고슬라비아의 대외부채에 대한 상환연기 등이 가능해져 대외 거래에 있어서도 유고슬라비아는 일단 한숨을 돌릴 수가 있게 되었다.
그같은 상황이니 만큼 유고에 대한 우리 기업의 진출 가능성은 다른 어느 동구 국가보다도 크다고 할수 있고, 에모나와 같이 신용이 괜찮은 파트너와 상대할 경우 인켈의 경우에서 보듯 재고 판매라는 다소 생소한 거래형태도 좋은 교두보가 될수 있는 것이다.
그런 교역 확대의 가능성을 우리는 유고에서 돼지 가죽을 수입하고 있는 중소기업 금흥양행의 경우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금흥양행에 가죽을 수출하고 있는 우톡은 인터마키팅 비즈니스 어소시에이션이라는 이름의 그룹에 속해있는 일개 제조업체다.
인터마키팅은 우톡과 같은 제조업 외에 금융업·무역업 등도 영위하고 있는 그룹으로, 인터마키팅의 「자갈·조란」회장은 유고의 주케냐·주 수단대사를 지냈던 영향력 있는 인물이다.
『우리는 원래 돼지 가죽을 터키의 치프트 사카사에 수출하고 한국의 금흥양행은 그치프트 사카사로부터 다시 재가공된 가죽을 수입하고 있었다. 지난해 8월 터키에 출장 갔다가 금흥의 이규용 사장을 처음 만나 직접 거래를 트자는 아이디어를 얻게 됐다. 한국 기업과는 처음 거래를 하게된 것인데 한국인들은 솔직하고 정확하며 대금 지급도 신속했다. 서울과의 시차가 9시간 난다는 것도 같이 일하기에는 안성맞춤이다.

<반도체 수입의사>
나는 앞으로 한국과 유고와의 관계에 대해 매우 낙관적인 견해를 갖고 있다. 최근에는 연방 정부의 각료로 있는 내 친구들에게 왜 한국과 직접 외교관계를 서둘러 맺지 않느냐고 권하기까지 했다.
「자갈」회장이 이끄는 인터마키팅 그룹은 단순히 한국으로의 돼지가죽 수출에만 주목하고 있지 않다.
그들은 우톡이 돼지가죽을 수출해 금흥으로부터 받은 달러를 가능한 한 모두 활용, 한국으로부터 수입할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열심히 찾고 있다.
그들은 이미 고려무역과 접촉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비록 성사가 되지는 못했지만 삼성전자의 2백56KD램을 월1백만개씩 수입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한 일도 있고, 계속해서 한국산 스키 재킷, 자동차 액세서리 등 의류와 잡화 등에 대해 관심을 보이고 있다.
꼭 재고 판매와 같은 「모험적」인 판로가 아니더라도 상호 교역의 입장에서 얼마든지 수입 신용장을 열고 달러를 받아가며 우리상품의 대 유고 진출을 모색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인켈과 금흥양행은 동구 국가중 경제상황이 가장 좋고 IMF와도 협의해 가며 가장 앞서서 자본주의적인 경제개혁을 추진해 가고 있는 유고와 어떻게 경제교류를 확대해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실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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