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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권석천의 시시각각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때문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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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권석천
권석천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권석천 논설위원

권석천 논설위원

올해는 또 어떤 일이 날 놀라게 할까. 무엇에 속 태우고, 무엇을 후회하게 될까. 새해 제야의 종이 울릴 때마다 나는 괴로워했다. 그래도 2019년은 좀 달라지지 않을까. 책을 읽었으니. 『내가 우울한 건 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때문이야』(박한선)라는 긴 제목의 책을.

새해 서투른 우리 마음 흔들 프레임에 #휘둘리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신경인류학의 눈으로 일상을 분석한 이 책은 가르쳐준다. 쓸데없이 걱정하고, 괜히 불안하고, 사소한 일에 집착하고, 늘 식탐 앞에 무너지고, ‘좋아요’를 갈구하고, 스스로를 게으른 천재로 착각하고, 선한 이웃에 반감을 드러내는 게 모두 살아남기 위해 좌충우돌해온 진화의 결과물이라고. 그러니 내 탓도 사회 탓도 하지 말고, 서투르고 허약한 마음을 잘 다스리며 살아가라고. 난  달리는 전철에서 유레카를 외칠 뻔했다.

이게 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때문이야.

보라. 신문과 유튜브와 카톡은 볼륨을 높인다. “적폐청산은 정치보복일 뿐이다. 반대파를 씨 말리려는 수작이다.” 패거리, 편 가르기, 사화(士禍), 주살(誅殺), 멸족. 섬뜩한 단어들에 가슴이 콩닥거리고 호흡이 가빠지고 괄약근 부근까지 저릿해질 때쯤 어디선가 익숙한 바람이 불어온다. 아, 역시 한국은 안 되는구나! 정권 바뀌니까 또 죽고 죽이는구나! 그럴 땐 염불 외듯 이 말을 되뇌며 흥분을 가라앉혀야 한다.

그래.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때문이야.

책은 말한다. 우리 마음에 사는 ‘조상님’ 탓에 불안은 아주 쉽게 조건화되고, 격렬한 공포 반응을 보이게 된다고. 일단 불안을 받아들이고(수용), 있는 그대로 바라본 다음(관조) 그냥 갈 길을 가라(행동)고. 불과 두 해 전이었다. 국정농단,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국정원 특활비, 사법농단, 재판거래…. 일련의 사건 뒤엔 어김없이 피해자들의 고통이 있었다. 주권을 되찾기 위해 거리로 뛰쳐나온 시민들의 분노가 있었다. 이후 수사와 재판이 ‘문재인식 정치보복’이라고 말한다면 피해자와 시민들 얼굴에 소금을 뿌리는 것이다. 선택적 기억상실도 불완전한 진화의 결과물이라고? 차라리 이렇게 이야기하라.

이게 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때문이야.

그럼에도 이제까지 진화해왔고 계속 진화해갈 우린 있는 그대로 봐야 한다. 검찰 수사 방식에 문제가 있었다. 압수수색과 구속이 능사였고, 피의사실을 흘렸고, 도주 우려 없는 사람에게 수갑을 채웠다. 경고하고 제지했어야 한다. 이래서야 어떻게 검찰 개혁을 말할 수 있습니까! 청와대와 법무부는 그러지 않았다. 우린 비판하고 시정을 요구해야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겨울 광장에 섰던 시민들을 왕조시대의 암투로 끌어내리진 말라. 옳고 그름이 분명한 사안까지 ‘정치보복’ ‘진영논리’ 프레임에 욱여넣고 스릴과 서스펜스를 즐기는 것, 이것 역시 그 옛날 돌도끼 하나로 복불복의 고독한 삶을 살아야 했던 ‘그분’이 다녀간 흔적일까. 추론이 맞다면 그들에게 알려주자.

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때문이야.

청와대 특감반 의혹도 다르지 않다. 누구도/ 모두를/ 끝까지/ 속일 순 없다. 팩트로 하여금 말하게 하라. 냉정하게 지켜보고 적폐의 독버섯이 다시 돋아나고 있다면 메스로 도려내라. 2년 전 언론의 책임을 저버렸던 자들이 지금 가장 유난스럽게 자유를 노래한다고? 그것마저 역사의 발전으로 받아들이자. 또 한번 이 한마디로 우리 안의 뒤숭숭하고 삐쭉삐쭉한 마음을 이겨내야 한다.

그래.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때문이야.

올 한 해 우린 그렇게 쉽게 휘둘리지도, 쉽게 확신하지도, 쉽게 환멸에 빠지지도 않으면서 우리의 진화한 똥배에 힘을 주고 나아가야 한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에게 지고 만다면 너무 아깝지 않은가. 진화해온 백만 년 세월이. 지난 2년의 시간이.

권석천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