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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체처럼 봐라 vs 뮤덕의 오지랖…뮤지컬 ‘관크’ 논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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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5호 12면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뮤지컬 ‘마틸다’가 공연 중인 LG아트센터엔 요즘 긴장감이 감돈다. 어린이가 거의 없는 여타 뮤지컬 공연장과 달리 자녀를 동반한 가족 관객이 꽤 있다 보니, 세계적인 명작 뮤지컬의 작은 디테일까지 놓치지 않으려는 ‘뮤덕(뮤지컬 덕후)’들과 자녀와 모처럼의 이벤트로 극장을 찾는 일반 관객 사이에 신경전이 벌어지고 있는 것. 집중력이 떨어지는 어린이들의 산만한 관람 태도에 대한 뮤덕들의 컴플레인과 “남에게 피해 줄 정도는 아니었다”는 엄마들의 대립이 첨예하다.

자녀 동반 문제 #어린이들 산만한 태도에 불만 표출 #“집중력 떨어져” “피해 안 줘” 대립 #관람객들 충돌 #덕후들 동일 작품 수십차례 관람 #공연 방해 관객과 몸싸움 벌이기도 #관람 예절 진화 #핸드폰 사용, 불법 촬영 등 사라져 #저변 확대 위해 포용적 자세 필요

공연 초기 몇 차례 언쟁이 붙자 제작사와 극장 측은 긴급 회의를 거쳐 관람예절 안내문을 제작·배포했다. 공연 전에는 “이 공연은 어린이 전용 공연이 아니며 부담없이 리액션을 할 수 있는 마당극도 아니”라는 안내 멘트도 내보내고 있다.

하지만 양측의 입장 차이는 여전하고, 사이에 낀 극장 측은 만약 있을 충돌에 대비해 늘 긴장 상태다. LG아트센터 강연희 하우스 매니저는 “매니어들은 어린이가 패딩 부스럭 거리는 소리만 내도 ‘관크’라며 눈치를 주고 어머니들은 억울하다고 맞선다. 초동 대처가 중요한데, 가족 관객이 더욱 많아질 겨울방학을 앞두고 바짝 긴장하고 있다”고 털어놨다.

몇 년 전부터 공연계에 ‘관크(관객 크리티컬)’라는 신조어가 등장했다. 게임에서 결정적 피해를 입는 경우에 사용하는 용어 ‘크리(critical의 약어)’를 차용해 공연 관람에 피해를 주는 다양한 행동을 비하하는 데 쓰이는데, 특히 ‘뮤덕’들의 온라인 커뮤니티 공간에서 ‘관크 혐오’ 담론이 뜨겁다. ‘OO공연 O월 O일 O열 O번 관객’이라고 콕 집어 가리키며 ‘수구리(구부정하게 앉아 뒷좌석 시야를 침해하는 행위)’, ‘폰딧불(핸드폰 불빛으로 신경쓰이게 하는 행위)’, ‘커퀴밭(커플들의 애정행각을 바퀴벌레에 빗댐)’ 등 각종 관크 경험담을 털어놓으며 타도 대상으로 규정하고 있다.

공연장에서 체감하는 분위기도 대체로 까칠하다. 죽은 듯 꼼짝 않고 보는 ‘시체 관극’이 가장 모범적인 관람태도로 꼽히고, ‘관크’ 행위자를 향한 ‘직고나리’(‘직접 관리’의 은어로, 대놓고 눈치주거나 항의한다는 뜻)도 흔하다. 공연 도중 살짝 앞좌석을 건드려도 눈치를 주고, 패딩을 입고 들어온 사람에게는 미리 경고하기도 한다. 세대갈등 양상도 보인다. “뒷자리 할배한테 기침 관크 당했다” “애엄마가 아들이랑 1부 내내 떠들길래 눈치 좀 줬다” 등은 공연장 화장실에서 흔히 듣는 대화다.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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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 동반 ‘마틸다’ 공연장 긴장감 돌아

관람 예절을 모를 리 없는 공연 관계자들도 ‘관크’ 범죄자 신세가 될 정도로 기준도 까다롭다. 최근 홍보담당자 A씨는 암전 후 커튼콜 시작 전에 스마트폰을 켰다가 뒷자리 관객에게 ‘등짝 스매싱’을 당했다. 공연기자 B씨는 수첩에 메모를 하다가 컴플레인을 당했다. 뮤덕들이 대부분인 소극장에서는 더욱 심하다. 무용가 C씨는 객석에서 일행과 귓속말을 했다가 뒷자리 관객과 싸움이 붙었다. 그는 “대극장 무대에만 서서 몰랐던 소극장 관람 문화에 큰 쇼크를 받았다”고 했다. 뮤지컬 평론가 원종원 순천향대 교수도 관객층을 파악하려고 객석을 둘러보다가 옆자리 관객에게 불평을 들었던 경험을 털어놨다. “처음 뮤지컬 보러온 중년남자라는 편견에 나를 주시했던 것 같다. 함께 모여서 보는 게 공연인데 요즘 관객들은 점점 예민하게 다른 사람에게 신경을 쓰고 있다”는 게 그의 말이다.

한국 뮤지컬 시장은 2000년대 들어 급성장했다. 문화체육관광부와 예술경영지원센터의 2018년 공연예술 실태조사에 따르면, 공연 티켓판매 수입 3974억원 중 뮤지컬이 2296억원으로 절반 이상(57.8%)을 차지한다. 전체 매출은 3500억 규모로, 2000년대 초반 100억원 규모였던 것을 감안하면 10여년 만에 35배 이상 팽창한 셈이다.

짧은 기간에 압축성장하면서 관람 행태도 독특하게 발전했다. 관객층이 남녀노소 고른 비율이 아니라 20~30대 여성에 집중돼 있고, 이들이 동일 공연을 반복해서 보는 ‘회전문 관람’이 매출의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다. 올해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된 ‘번지점프를 하다’의 경우 총 94회중 29회 관람자가 나왔고, 서울예술단 ‘다윈영의 악의 기원’은 총 9회 공연 전회차 관람 관객이 19명이나 됐다.

이들은 비싼 티켓값을 지불한 만큼 권리수호 의지가 강하다. 서울예술단 김아형 홍보팀장은 “뮤덕들 입장에선 생활비의 상당한 비중을 쏟을 만큼 관람이 삶에서 중요한 부분이기에 방해받는 것이 불쾌할 수밖에 없다. 똑같은 배우들의 조합이라도 애드립 등 디테일이 매번 다른데, 그걸 놓치지 않기 위해 집중하다보니 오직 나와 공연만 교감하고 싶어지는 것”이라고 풀이했다. 한정호 공연평론가는 “소수정예부대가 뮤지컬 산업을 떠받치고 있다는 ‘덕후’로서의 자부심이 배타적 태도로 표출되는 것”이라고 짚었다.

‘관크’ 담론에 긍정적인 면도 있다. 관람 매너에 무지한 초심자들에게 타인에게 심각한 피해를 주는 행동을 인지시키자 공연장 분위기 자체가 정돈된 측면은 있다. 몇 해 전까지 일반적이던 ‘폰딧불’이나 진동벨소리, 불법 촬영을 하다 저지당하는 사례도 거의 사라졌다. 한정호 평론가는 “2000년대 중반엔 공연장에 애완견을 몰래 데려온 사례도 있었다”면서 “소셜미디어 활동이 활발해지고부터 관람 매너가 빠르게 정화됐다. 모두가 매너에 예민해지고 자제하는 분위기가 형성되니 초심자들이 와도 금방 적응하게 됐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뮤지컬은 대중문화에 속하기에 지나친 엄숙주의는 문제라는 시각도 있다. ‘마틸다’를 런던에서 먼저 봤다는 강연희 매니저는 “다같이 즐기는 관람 문화가 부러웠다”고 했다. 뮤지컬의 본고장 브로드웨이와 웨스트엔드의 공연장은 한국 뮤지컬 공연장 분위기와는 사뭇다르다. 전세계에서 모여든 관광객들이 주요 관객이라 축제분위기다. 잘 알려진 대표 넘버가 나오면 콘서트 수준으로 환호와 박수가 터져나와 공연 진행을 관객 반응에 맞춰 가야 할 정도다. ‘라이온 킹’ ‘마틸다’ ‘해리 포터’등 가족 뮤지컬의 경우 소위 ‘관크’는 상상 이상이지만, 핸드폰 사용이나 촬영 금지 등 기본 매너 기준을 넘어서는 디테일한 관람태도를 문제삼지 않는다.

식음료 반입도 가능하다. 극장 내부에서 스낵과 음료수, 와인 등 주류, 아이스크림을 팔고, 영화관처럼 먹으면서 관람할 수 있다. 한국에서는 유일하게 샤롯데씨어터에서 뚜껑 있는 음료의 반입이 가능할 뿐, 대부분의 공연장이 생수 반입만 허용하고 있다. 한정호 평론가는 “라이선스 뮤지컬이 본토에는 적용하지 않는 엄격한 관리 기준을 계약조건으로 걸면서 우리 엄숙주의가 시작된 측면이 있다. 뮤지컬 공연장이 식음료 규정만 완화해도 중요한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고 지적했다.

“뮤지컬 시장 저변 확대 위한 성장통”

원종원 평론가는 지나치게 비싼 가격을 문제로 꼽았다. 선진국과 액면가는 비슷하지만 국민소득 대비 체감 가격이 2배 이상이라 한국인들은 공연장 가는 것을 특별히 고급스런 행위라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뮤지컬을 고급예술이라고 칭하며 무지를 드러내는 정치 지도자도 있다. 그런 인식이 있으니 엘리트 예술장르라는 선입견과 엄숙주의 성향이 생긴다. 영상을 이용한다고 영화와 광고가 같은 바구니가 아닌 것처럼 무대를 이용한다고 뮤지컬을 클래식과 같이 볼 수 없다. 뮤지컬은 일상화되고 생활 안에서 소비되어야 한다”면서 “티켓 가격을 낮추는 것이 대중화와 산업화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특히 뮤지컬 산업이 정체기에 도달했다고 평가되는 지금은 저변확대가 필요한 시점인 만큼,  포용적 자세가 필요하다는 게 업계의 중론이다. ‘마틸다’도 중장년이나 미래 관객인 어린이까지 관객층을 확산하는 전략 차원에서 레퍼토리 다양화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마틸다’ 제작사 신시컴퍼니 측은 “뮤지컬계가 공연매너를 정착시켜야 되는 단계에서 겪을 수밖에 없는 성장통”이라며 “비매너 관객이 분명 있지만 너무 예민한 객석은 건강한 문화가 아니다. 독서실이 아니라 공연장이고, 같이 웃고 숨 쉬며 보는 게 뮤지컬이란 걸 이해해 가는 과정”이라고 진단했다. 원종원 교수도 “관람 매너 교육도 중요하지만 ‘관크 혐오’가 바람직하지 않다는 소비자 교육도 같이 진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겨울엔 옷 부스럭거리는 ‘패딩 관크’가 대표적

뮤지컬 전문지 ‘더뮤지컬’과 공연 전문 포털 ‘스테이지톡’의 2016년 조사에 의하면 관객들은 10회 공연 중 4.5회 정도 ‘관크’를 당한다고 답했다. 일반 관객이 3.5회라고 답한 데 비해 슈퍼 매니어는 5회라고 답해 매니어일수록 관크 발생 빈도도 높게 나타났다. 관람 빈도가 높은 매니어일수록 주변 관객들의 태도에 예민해진다는 의미다. 원종원 교수는 “관크 논란의 이유는 기본 에티켓을 넘어서 타인 움직임 자체에 불쾌감을 느끼는 예민함 때문이다. 실제로 불쾌감을 준 게 아니라 지불 비용에 상응한 대우를 받고 싶은 심리에 작품이 아닌 주변 관객에게 신경쓰는 현상”이라고 짚었다.

사실 기본적인 관람 매너에 속하는 ‘수구리’‘폰딧불’‘메뚜기(더 좋은 좌석으로 이동)’‘먹방 관크(식음료 취식)’‘설명충(일행에게 공연에 대해 설명하는 행위)’ 등은 가족 뮤지컬을 제외한 공연장에서 거의 사라졌다. 대신 신종 관크가 떠올랐다. 대표적인 것이 겨울철 ‘패딩 관크’다. 패딩을 입은 채로 객석에 앉으면 조금만 움직여도 마찰음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소리없이 대사나 노래를 따라하는 행위도 옆사람 시선을 빼앗는 ‘붕어 관크’로 규정된다. 생리적 현상인 ‘기침 관크’, 기침을 막으려 사탕을 까먹는 ‘사탕 관크’도 모두 ‘타도 대상’이다. 개인별로 다를 수 있는 디테일한 관람태도를 일일이 지적하는 추세에서 과연 어느 선까지를 ‘관크’로 볼 것인가는 생각해볼 문제다.

관크를 당했다고 느꼈을 때의 대응방식도 논란의 여지가 있다. 공연 도중에 직접 터치를 하는 등 시정을 요청하는 ‘직고나리’는 ‘역관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박병성 더뮤지컬 편집장은 “자기 권리보다 타인을 배려하는 태도가 마찰을 피하는 길이다. 공연장에 오는 것 자체가 즐거운 이벤트인 어떤 이는 옆 사람의 예민한 태도로 그날의 기분을 다 망칠 수 있다는 걸 인지시켜야 한다”고 전했다.

유주현 기자 yjj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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