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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발찌 절단한 여고생 성추행범의 3개월 '아날로그 도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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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발찌 이미지 사진. A씨가 찬 전자발찌와 상관 없음. [중앙포토]

전자발찌 이미지 사진. A씨가 찬 전자발찌와 상관 없음. [중앙포토]

10월 18일 오후 7시쯤 남성 A씨(33)는 자신의 집 근처인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의 한 PC방에서 온라인 게임을 즐기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옆자리에 앉은 여고생(17)이 눈에 들어왔다.

A씨의 발목에는 지난 3월부터 검은색의 전자발찌(위치추적 전자장치)가 채워져 있었다. 앞서 강제추행죄로 2년여간을 복역한 그다. A씨는 순간적으로 여고생의 몸을 더듬었다. 갑작스러운 추행에 놀란 여고생이 소리치고 반항하자 A씨는 황급히 PC방을 벗어났다. 동시에 경찰에 신고가 접수됐다.

강제추행죄 복역 뒤 전자발찌 차고 범행


A씨는 달아나는 와중에 시내의 한 상점에서 휴대용 절단기를 샀다. 자신의 위치정보를 실시간으로 교정기관에 전송하는 전자발찌를 끊기 버리기 위해서다. 전자발찌는 이날 오후 11시40분쯤 훼손돼 수정구 길가에 툭 하니 버려졌다. 3개월에 걸친 도주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강제추행 이미지. 본 기사내용과 직접적인 연관은 없음. [연합뉴스]

강제추행 이미지. 본 기사내용과 직접적인 연관은 없음. [연합뉴스]

A씨는 자신의 뒤를 쫓는 경찰을 따돌리려 은신 지역으로 서울, 경기 서부지역을 오갔다. 모두 무연고 지역이다. 부모가 사는 수원도 찾지 않았다.

이동할 때는 반드시 버스나 지하철 등 대중교통을 탔다. 의식적으로 현금이나 일회용 승차권으로 요금을 지불했다.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있는 본인 명의의 신용카드의 경우 동선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잠자리는 주로 찜질방이나 사우나에서 해결했다. 역시 현금을 냈다.

온라인 게임 끊고, 휴대전화도 사용 안 해

철저한 ‘아날로그’ 생활로 돌아갔다는 게 경찰의 설명이다. 기지국으로 위치가 확인되는 휴대전화는 단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다. 혼자 살았던 그는 가족은 물론 지인에게도 전화 한 통 하지 않았다. A씨는 특정 온라인게임을 주로 했는데, 도주 기간 내내 끊었다. 본인 아이디나 비밀번호를 입력해 로그인하는 순간 역시 자신의 위치가 드러날까 봐서다. PC방에서는 일용직 일자리를 찾기 위한 포털 검색만을 주로 했다.

도주 전에도 파트타이머로 일했던 A씨는 생활비가 떨어지자 건설현장이나 식당 등지에서 일당제로 일했다. 그가 도주 중이었던 11월 7일, 8년 도피생활을 하던 최규호 전 전북교육감이 붙잡혔다. 지난 19일 검찰수사로 드러난 최 전 교육감의 과거 생활은 ‘황제 도피’였다. 검찰에 따르면 최 전 교육감은 매달 700만원을 쓰며 골프와 댄스 등을 즐겼다고 한다. 반면 A씨는 여느 도주범처럼 팍팍한 삶을 이어갔다.

황제도피를 한 최규호 전 전북교육감(왼쪽)과 도피를 도왔다는 혐의를 받고 있는 최규성 전 농어촌공사 사장(오른쪽) [연합뉴스, 뉴스1]

황제도피를 한 최규호 전 전북교육감(왼쪽)과 도피를 도왔다는 혐의를 받고 있는 최규성 전 농어촌공사 사장(오른쪽) [연합뉴스, 뉴스1]

3개월 가까이 경찰을 따돌렸다는 생각에 A씨는 조금씩 경계심이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아날로그’ 생활만 잘 이어가면 버틸 수 있을 것 같다는 착각도 했다고 한다. 최근 A씨는 지하철 1호선 부천 역곡역 인근에 리빙텔을 타인 명의로 얻는 데 성공한다. 떠돌이 생활에서 거처가 마련된 것이다. 해당 리빙텔은 보증금 한 푼 없이 월세만 내면 돼 명의 확인은 없었다.

하지만 행적이 조금씩 경찰에 포착되기 시작했다. 사건을 맡은 성남 수정경찰서 형사과 관계자는 “우리끼리 말로 ‘흔적을 흘리고 다닌다’고 하는데 경계심이 풀렸던 것 같다”고 말했다.
결국 A씨는 지난 15일 오전 3시 리빙텔 앞에서 잠복 중이던 경찰에 붙잡혔다. 경찰은 폐쇄회로(CC)TV 영상 등을 분석해 A씨의 거처를 파악한 뒤였다. 그는 검거 뒤 “다시 처벌받는 게 두려워 그랬다(도망 다녔다)”고 나지막이 말했다.

경찰은 A씨를 특정 범죄자에 대한 보호관찰 및 전자장치 부착 등에 관한 법률 위반과 강제추행 등 혐의로 수사 중이다. 한편 전자발찌를 착용하고도 A씨처럼 버젓이 성범죄를 저지르는 범죄는 지난 4년간 한 해 평균 56건 발생했다.

성남=김민욱 기자 kim.minwo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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