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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나물과 향수병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9면

남편을 따라 낯설고 물 설고 말조차 잘 통하지 않는 미국 땅을 밟은 한국여자 넷이서 오랜만에 야채가게를 찾았다.
딱히 누가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는데도 2시간의 영어공부를 마친 뒤 눈빛으로 의견이 모아져 자연스레 발길을 옮긴 야채가게.
매주 수요일 문을 여는 이 가게는 한국의 장터를 찾는 기분을 한껏 느끼게 해준다.
한국산 채소들이 많은데다 오랫동안 보지 못한 이웃들을 여기서 만나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우리 넷은 콩나물·숙주나물·오이·시금치·배추·마늘·고구마·오렌지를 다투어 장바구니에 담았다.
3월의 미각을 충분히 느낄만한 상큼한 야채를 찾지는 못했지만 「오늘 저녁은 콩나물밥을 맛있게 지어먹어야겠다」는 다짐을 하면서 설렘을 느낀다.
운전기사를 자청했던 성혜 씨가 점심대접까지 하고프단다.
이국생활인데다 남편들이 직장에서 상하관계 이다 보니 터놓고 친해지기가 쉽지 않은 처지에서 모처럼 「열린 마음」이 됐다.
이날 우리가 먹은 점심은 켄터키 닭튀김, 김치·깍두기와 뜻밖에 뒷맛이 쌉쌀한 씀바귀무침이었다.
초고추장에 버무린 씀바귀무침은 아스라한 고향 기억으로 달러가게 했다.
성혜씨 네 뒤뜰에 가득한 씀바귀들을 바라보며 남들이「할머니타입 」이라는 나의 음식솜씨는 유년의 미각 때문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대구에서만 줄곧 컸는데도 나는 시골에서 자랐다는 착각 속에 빠져들곤 한다.
우리들의 어린 시절은 결코 부유하지 않았지만 어머니의 독특한 음식솜씨는 늘 풍요로 운 기분을 느끼게 해주었다.
어머니 요리솜씨 중 특히 일품은 나물요리였다.
나랑 어머니는 갖가지 나물에 비벼 먹는 것을 즐겼다. 이제 언제쯤 그 맛을 다시 볼 수 있을까.
봄날 식단엔 냉이나물·달래나물이 제격인데 냉동식품과 함께 맞는 미국의 봄은 여느 날 같이 우울하기만 하다.
그래서 봄나물이 그리워지는 이 3월에는 더욱 견디기 어려운 향수병에 시달리나보다.

<1000 Airport Rd.#15 Huntsville, Ala.35802 U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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