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마크롱은 노란 조끼에 항복, 메이는 브렉시트 표결연기 굴욕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4면

메이 영국 총리가 10일 하원에서 브렉시트 합의안 표결 연기를 발표하고 있다. [AP=연합뉴스]

메이 영국 총리가 10일 하원에서 브렉시트 합의안 표결 연기를 발표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이 의회에 브렉시트를 실행하겠다는 의지가 있는 겁니까?”

프랑스·영국 동시 리더십 위기 #마크롱 “국민 분노 합법적” 담화 #최저임금 월 100유로 인상 등 발표 #메이, 브렉시트안 의회 설득 실패 #FT “좀비 총리” … 불신임안 기류도

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가 10일(현지시간) 오후 하원 긴급 연설에서 자신의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 협상안에 반대하는 의원들을 향해 이렇게 소리쳤다. 그러자 의석에선 야유와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야당인 노동당 석뿐 아니라 메이 총리가 속한 보수당 의석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메이 총리는 11일로 예정됐던 브렉시트 협상안 하원 표결을 연기했다. 의회에서 “상당한 표차로 부결될 것으로 보여 취소한다”고 말했다. 직전까지 돌파 의지를 보여 왔기에 굴욕적이라는 평이 나왔다. 파이낸셜타임스(FT) 칼럼은 메이를 ‘좀비 총리’로 표현했다. 당 안팎에서 리더십에 이미 사망 선고가 내려졌다는 의미다.

같은 날 저녁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생방송 대국민 담화를 발표했다. 노란 조끼 시위가 4주째 이어지고 침묵하는 자신에 대한 비난이 쏟아지자 수습책을 발표했다.

그는 “내년부터 노동자의 최저임금을 월 100유로 인상할 것”이라며 “우리는 일을 통해 존엄하게 살 수 있는 프랑스를 원한다”고 말했다. 프랑스의 최저임금은 현재 세후 월 1185유로(약 153만원)다.

마크롱 대통령은 폭력 시위를 비난하면서도 “국민의 분노는 깊었고 대부분 합법적이었다”고 인정했다. 이어 “시위 초기 국면에서 제대로 답을 드리지 못했고, 저의 주의 깊지 못한 발언으로 상처를 드린 점도 책임을 통감한다”고 사과했다.

‘노란 조끼’ 시위 참가자들이 10일 프랑스 마르세유 인근 고속도로 톨게이트에서 마크롱 대통령의 대국민 담화 생방송을 지켜보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노란 조끼’ 시위 참가자들이 10일 프랑스 마르세유 인근 고속도로 톨게이트에서 마크롱 대통령의 대국민 담화 생방송을 지켜보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유럽의 주축인 영국과 프랑스가 내부 문제로 리더십의 위기를 동시에 겪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당선과 함께 전후 세계질서의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줬던 브렉시트가 영국을 혼돈으로 몰아넣었다. 이런 기류의 근원이었던 세계화의 부작용은 프랑스에서 양극화를 심화시키면서 저소득층의 대규모 시위로 이어지고 있다.

메이 총리는 의회 표결 대신 11일 네덜란드 마르크 뤼테 총리, 독일 앙겔라 메르켈 총리 등과 만나 의원들의 우려를 해소하겠다는 생각이다. 의원들의 반대가 급증한 것은 EU 소속인 아일랜드와 영국령 북아일랜드 간 ‘하드 보더’(국경 통과 시 통행과 통관을 엄격히 하는 것)를 피하려고 마련한 ‘안전장치’(백스톱) 때문이다.

메이가 시간을 벌었지만 빈손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크다. 도날트 투스크 EU 정상회의 상임의장 등은 백스톱이 임시 조처라는 언급 정도는 몰라도 합의안 재협상은 없다고 못 박았다. 브렉시트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파운드화 가치는 18개월 만에 최저로 추락했다.

정치적 불안정은 더 심해질 전망이다. 브렉시트에 반대하는 스코틀랜드국민당(SNP)은 제러미 코빈 노동당 대표에게 11일 정부 불신임안을 제출하라고 종용했다. 코빈은 메이가 똑같은 협상안을 다시 의회에 제출해 보수당 내 반발이 극에 달하는 시점에 메이를 저격한다는 계획이다. 메이에 대한 불신임안이 의회에서 통과되면 내년 2월께 조기 총선이 치러지면서 당초 내년 3월 29일로 예정됐던 브렉시트 시한 자체가 연기될 수 있다.

메이 총리는 내년 1월까지 재표결이 가능하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아일랜드와 북아일랜드 국경 문제를 해결할 뾰족한 방안을 누구도 내놓지 못하고 있어 제2 국민투표 요구도 커지고 있다. FT는 “메이의 숨은 속내는 제2 국민투표를 통해 브렉시트를 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보도했다. 메이 정부는 이미 브렉시트 이후 영국 경제가 타격을 입을 것이란 자료를 공개한 바 있다. 이도 저도 못하고 시한까지 EU 합의안을 의결하지 못할 경우 ‘노 딜(No deal) 브렉시트’가 불가피하다.

한 달 넘게 침묵하던 마크롱 대통령은 노란 조끼 시위대의 요구를 상당 부분 수용했다. BBC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평했다. 마크롱 대통령은 저소득 연금생활자에 대한 세금을 올리려던 계획도 철회했다. 그는 “사회경제적으로 긴급한 상황이 있음을 확인했다”며 “월 2000유로(약 260만원) 미만을 버는 은퇴자를 대상으로 사회보장기여금(CSG)을 인상하려던 방안도 철회한다”고 설명했다.

마크롱은 대기업들이 사회 보장에 더 기여하도록 하기 위해 다음 주에 재계 인사들과 논의해 대책을 마련하겠다고 했다. TV 연설에선 우선 기업들이 연말에 세금이 부과되지 않는 보너스를 노동자들에게 주는 것을 권장하겠다고 소개했다.

마크롱은 그러면서도 전반적인 국가개혁 노선의 후퇴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우리는 세금을 더 신속하게 내리고 정부 지출을 통제하는 등 강력한 조치로 사회경제적 위급함에 대응하겠지만, 유턴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이어 “국가를 위한 역사적 순간에 우리가 서 있는데 내 걱정은 여러분뿐이고, 나의 유일한 투쟁은 여러분과 프랑스를 위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북아일랜드 EU에 남기는 ‘백스톱 조항’ 영국 여당서도 반발

영국 의원들이 브렉시트 협상안에 반대하는 가장 큰 이유는 아일랜드 백스톱 조항 때문이다. 백스톱은 브렉시트 이후 자유무역협정 등을 체결하지 못하면 북아일랜드를 EU 관세동맹에 남기는 안이다. 자칫 EU 소속인 아일랜드와 영국령 북아일랜드 간에 ‘하드 보더’(국경 통과 시 통행과 통관을 엄격히 하는 것) 문제가 생길 수 있어 이에 대한 ‘안전장치’(백스톱)를 마련한 것이다.

하지만 북아일랜드가 영국 나머지 영토와 분리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됐다. EU가 동의하지 않으면 백스톱을 끝낼 수 없다는 법률 검토까지 나오자 보수당에서도 메이에 대한 성토가 쏟아졌다.

런던=김성탁 특파원 sunty@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