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정당이 헛돌고 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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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민정당이 헛돌고 있다. 전국 지구당 위원장 70%이상의 찬성을 바탕으로 중간평가의 신임연계 국민투표를 건의했지만 결론은 야당 측이 요구한 중간평가 연기로 결판났다.
한마디로 청와대의 속뜻은 모르고 핏대만 올린 꼴이 됐다.
지구당에 임전준비를 지시하고 일부지역에서는 선거운동 경비까지 모금했으니 민정당 의원들의 당혹을 짐작할 만도 하다.
한데도 민정당 의원들은 뒷전에서 불평 몇 마디뿐이다.
중간평가를 국민투표로 실시해 정면돌파하지 않으면 당이 내일 당장 무너질 듯 외쳐대다가 그들이 당이 고사하는 길이라고 주장하던 중간평가 연기로 돌아서고 말았는데도 아무 소리 없이 잠잠하다는 것은 도무지 당 내부에 커다란 문제가 있다는 말밖에 안 된다.
민정당의 정면 승부론이 아예 처음부터 책략이었든지 아니면 한갓 시류에 편승한 공허한 외침에 불과했던 것인지 알 수 없다. 그걸 앞장서서 외쳤던 의원들은 말할 것도 없고 당론이라고 건의했다가 뒤통수 맞은 당직자들 중에 그런 사태에 대해 책임지는 소리한번 나오질 않고 있다.
하기야 선거공약으로 부르짖었던 당 민주화를 모두「공약화」시켰을 때도 아무 말 없었고 얼마 전에는 당의개혁을 내걸고 기구까지 설치하더니 청와대에서 눈 한번 꿈쩍하니까 아무소리 않고 있는 사람들이니 더 말할게 없다.
그들은 국민에게 한 약속, 아니 자기 당원에게 한 약속이 지켜지고 안 지켜지고 하는 것보다 위로, 옆으로 눈치보는 일이 더 중요한 모양이다.
바로 이런 데에 민정당의 진짜 약점이 있다.
권력자에 이리저리 줄을 대 공천 따내고 금배지 따면 그만 이라는 권력 유착적 발상이 지금도 민정당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이야 산으로 올라가든 바다로 가든 그들에겐 아랑곳할 일이 아닌 것이다.
집권당의 위기는 정부의 위기이고 또 확대되면 정치적 안정을 훼손하는 정국 전체의 위기로까지 이어질지도 모르는데 이들은 집권의 혜택을 누리는데는 재빨라도 그 책임을 지는 일에는 뒷줄서기를 다투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민정당은 청와대, 군부, 양외의 실세들 놀음에 겅중거리는 허깨비 신세가 되고 마는 것이다.
민정당을 더욱 속으로 곪게 만드는 건 개인간의 정략 다툼이다. 한때는 5공파, 6공파 하더니 신주류, 왕당파, 구공화파, 5공 잔당 등 갈래가 더욱 복잡해졌다.
당 개혁문제가 무산된 것도 정파간의 이해 때문이다. 청와대측에서는 노태우 친정체제를 만들어야 한다는데 당 일각에서는 노대통령은 당을 떠나고 당총재 경선을 하거나 수석 부총재 제를 앞당겨 실시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고있다.
결국 당의 개혁이 미뤄지고 만 것은 노 친정체제파가 이긴 탓이다. 하지만 이제 와서 노체제를 구축해서 당이 무얼 하자는 것인가.
노체제를 굳건히 하기 위해 후계체제 육성을 의미하는 당 개혁을 뒤로 미루는 것은 노대통령의 당 장악력을 확실히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노체제 구축을 빙자한 측근 세력들의 야심 때문이라고 보는 시각이 더 그럴싸하다.
민정당의 중심세력인 TK가 몇 갈래로 분열되고 지난번 중간평가 결정과정에서 보여줬듯 일부 당직자들의 의도적인 소외와 견제, 민정당을 철저히 희화화해 버린 당 결정의 번복 등은 민정당이 몇몇 정치적 야심가들간의 갈등으로 인해 뒤죽박죽으로 운영되고 있다는 단적인 예라고 볼 수 있다.
결국 민정당의 가장 큰 문제점은 지도력의 결여다.
정책결정 과정에서의 타이밍 상실, 우유부단 같은 것은 널리 지적된 사실이지만 최근에 드러난 몇 가지 문제는 정국에 대한 식견과 정치적 관리능력에서 심각한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노대통령이 자신의 가장 핵심적인 지지기반에서부터 말이 나오기 시작하여 그의 리더십에 대한 비판이 점점 공개적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 안타깝다.
최근엔 제2의 누구니 하는 말들이 몇몇 친인척들 주변을 떠다닌다는 사실은 아무리 심각히 지적이 되어도 지나침이 없을 지경이다.
5공 시절 친인척 개입이 권력 부패 적인 비리였다면 6공에 와서는 측근들의 「과욕활동」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지 않은지 주목해야할 상황이 빚어지고 있는 것이다.
지도부의 이런 혼란들은 제6공의 위상에 대한 노대통령 정부의 인식부족과 민정당의 줏대 없는 허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을 수가 없다.
청와대나 민정당을 운영해 나가는 관행뿐 아니라 그 속 깊은 발상에서는 5공식 권위주의가 거의 바뀌어지지 않고 있음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때로는 그들의 「민주화」에 대한 발언이 우스꽝스럽게 여겨지는 일이 종종 있다.
6공의 노정부는 아직도 정통성의 도전을 받고 있다. 그 자신이 공약했던 대로 군사적 통치 방식을 종식하고 완전한 민주화로 가는「과정」이며 20여년 독재체제에서 진정한 민주체제로 정치를 바로 잡아가는「과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방 자치제의 완전한 실시, 민정당 체제의 민주적 개혁 등이 지연되고 권력 집중시대의 유물인 소수 독점정치, 밀실 정치가 논란되는 이유를 알 수 없다.
중간평가 취소이후 여권 내 강경 세력의 불만이 쏟아지자 민정당은 또 갑자기 강경쪽으로 우르르 몰려가고 있다.
중평 취소이후 방향타를 잃은 정국의 앞날을 주도하기 위해서는 헌정체제 문제, 보수연합 문제 등 과제가 산적해 있다. 민정당이 중심을 찾고 진정한 보수세력으로서의 쇄신을 위한 뼈아픈 성찰의 눈길을 안쪽으로 돌려야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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