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힌 곳 뻥뻥 뚫고, 뚫어도 티 내지 않고 믿음직한 이을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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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을용이 4일 가나와의 평가전에서 왼발 중거리슛으로 동점골을 뽑는 장면. [중앙포토]

"가나전 골은 평가전이었기 때문에 의미가 없다."

이을용(31.트라브존스포르). 그는 골을 넣고도 내달리지 않는다. 요란한 몸짓으로 뒤풀이를 하지도 않는다. '너무 기뻐하지 말자. 아직 경기는 끝나지 않았다'고 스스로 다짐한다. 그래서 더욱 믿음직스럽다.

이을용은 4일 가나전에서 0-1로 뒤지던 후반에 통렬한 왼발 중거리슛으로 동점골을 넣었다. 공이 골키퍼 손을 맞고 그물을 흔드는 것을 확인한 뒤 그는 조용히 뒤돌아섰다. 2002 한.일 월드컵 터키와의 3~4위전에서 동점골을 넣고도 그는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은 채 달려오는 박지성을 안아주었다. 터져나오는 기쁨은 커다란 웃음으로만 표현했다. "골을 넣은 뒤 과도하게 달려서 체력을 낭비하지 말라"고 후배들에게 충고하는 일본 대표팀의 정신적인 지주 나카타 히데토시(볼턴)와 닮았다.

이을용은 대표팀의 '중원 3총사' 중에서 몸 상태가 가장 좋다. 박지성(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은 피로 누적으로, 김남일(수원 삼성)은 잦은 부상으로 제 컨디션이 아니다. 박지성이 윙포워드로 올라가고, 김남일이 주전에서 빠질 경우 이을용이 중원을 책임져야 한다. 지금 대표팀의 중심은 이을용이다.

이을용은 '막힌 곳을 뚫어주는' 선수다. 그는 좀처럼 볼을 뺏기지 않고, 상대에게 겹겹이 둘러싸여도 볼을 동료에게 연결해준다. 대표팀 후배들은 "을용형은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플레이를 풀어나갈 수 있는 선수"라고 신뢰를 보낸다.

이을용의 축구인생도 '막힌 곳을 뚫어나가는' 과정의 연속이었다. 강릉상고(현 강릉제일고) 시절 뛰어난 실력을 발휘했지만 팀이 전국대회 4강에 들지 못해 대학 진학에 실패했다. 청소년대표에 뽑히고도 하룻밤 새 다른 선수로 대체되는 일도 겪었다. 축구에 환멸을 느낀 그는 충북 제천에서 나이트클럽 종업원(그때 별명이 '무장공비'였다)으로 일하는 등 방황의 세월을 보냈다. 철도청(현 한국철도공사) 이현창 감독의 설득으로 다시 축구화를 신은 그는 월급 80만원을 받고 냉.난방도 안 되는 철도청 보선사무소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기량을 닦았다. 상무-부천 SK를 거치며 '한국 최고의 왼쪽 미드필더'로 성장했고, 세계에서 가장 거칠다는 터키 수퍼리그에서도 살아남았다.

이을용은 8일 훈련이 끝난 뒤 "미드필드에서 강력한 압박으로 상대를 제압하고, 게임을 풀어주는 데 집중하겠다"고 자신의 역할을 밝혔다.

2002 월드컵에서 1골.2도움을 기록한 이을용은 최순호(1골.3도움)가 갖고 있는 월드컵 국내 최다 공격포인트에 도전한다.

레버쿠젠=정영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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