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지자단체는 한성부민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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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된 뒤 당시 한성에서는 우리 나라 최초의 근대적 지방자치를 모색하는 한성부민회가 상당한 정도의 활동을 펴나가다 일제의 탄압과 방해공작으로 무산되었다는 사실이 새로이 밝혀졌다.
이 같은 사실은 윤병희 씨(국사편찬위원회연구원)가 최근 이광린 서강대교수 퇴직기념 논문집으로 발간된『동아연구』에「한성부민회에 관한 일고찰」이란 논문을 발표, 한성부민회가 일제와 관련된 각종 친일 의전행사만을 했었다는 종래의 통설은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함으로써 밝혀졌다.
논문에 따르면 1907년10월 일본 황태자 방한 환영준비를 위한 봉영회가 한성부민회의 설립계기가 되었던 것은 사실이나 1908년5월 이를「자치제도」로 만들기 위한 발기회가 개최되면서부터 상당기간 일정한 자치활동을 펴나가기도 했다는 것이다.
한성부민회를 자치제도로 새롭게 조직하는데 앞장 선 인물은 유길준. 그 당시 우리 나라에 가장 이상적인 정치제도로 입헌군주제를 상정하고 그 토대로 지방자치제도의 발달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믿어 한성부민회의 설립을 주도해나간 것으로 알려졌다. 유길준은 또 일본의 보호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사회 하층민을 개량, 부강을 도모해 일본과 친선을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고 이러한 사회개량에 자치제도의 발달이 크게 도움될 것으로 믿고 있었다는 것.
한성부민회는 1908년5월의 발기대회 직후 당시 일제의 조선보호통치기구인 통감부에 승인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그러나 유길준 등은 이러한 일제의 방해공작에도 불구, 부민회의 하부조직으로 20여 개의 방회를 조직, 방마다 소학교를 설립, 의무교육을 실시하는 등 자치활동을 펴나간 것으로 밝혀졌다.
한성부민회의 규약 (1909년3월 확정)에 따르면 부민의 자격은 ▲독립생활을 하는 가족의 20세 이상 남자 ▲1년 이상 부 거주자 ▲국세 일원 이상 납부자 등으로 규정되어 있어 당시영국이나 일본의 자치제와 마찬가지로「자격제한」을 두고 있었다.
부민회는 회장·부회장·삼리원의 임원과 1천 가구에 1인씩의 비율로 선출된 44인의 의원으로 구성되었고 하부조직으로 당시 한성의 행정구역인 동·서·남·북·중 5부마다 부회를, 지금의 동에 해당하는 방을 2∼5개씩 묶어 방회를 설치하는 조직 편제를 갖추기도 했다.
부민회의 주요활동은 첫째 국내의 각종 의식행사와 일본인관광단 환영회 등 친일적 의식행사 및 수재민구제를 위한 모금활동, 서간도목민학교에 대한 원조사업 등을 꼽을 수 있다.
친일행사는 유길준이 앞서 말한 일본과의 친선도모를 유지하면서 사회개량을 통해 일본의 보호를 벗어나려는 정책에서 비롯된 것이었고 일제의 합방의도가 노골화된 이후부터는 반일적 태도로 변화됐음이 밝혀졌다.
구체적 사례로는 부민회 주최 예정이었던 이등박문을 위한 국민추도대회가 취소되었으며 합방을 제기한 일진회와 국민신보를 맹렬히 성토했던 점을 들 수 있다.
한편 부민회의 자치기구로서 실질적인 활동은 각 방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밝혀졌다. 방회의 주요활동은 방역 등 위생활동과 교육사업. 방역활동은 1909년 가을 콜레라의 대유행에 따른 일시적인 활동이었으나 교육사업은 관진학교 등 소학교 11개를 설립, 지속적으로 추진된 것으로 밝혀졌다.
일제는 한성부민회가 자치활동을 펴나가고 규모를 갖추자 본격적인 탄압을 시작, 부민회 회비징수를 금지시켜 재정압박을 주는 등 교묘한 탄압을 계속해 한성부민회는 합방직후인 1911년4월 지방행정제도 개편 과정에서 소멸되고 말았다.

<강영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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