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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이사제’ 도입 속도 내지만 … 노사 갈등 못 풀면 역효과 우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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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지난 7월19일(현지시간) 방문한 독일 베를린 소재 한스뵈클러재단. 독일 노동조합의 싱크탱크인 이 재단의 장 폴 기어츠 연구원은 독일에서 노동이사제가 정착한 이유로 ‘협력적 노·사 문화’를 꼽았다. 독일의 노동이사는 이사회에 참여해 노·사 간 타협점을 찾는 과정에서 핵심 역할을 하는데, 여기엔 그동안 형성된 노·사 문화가 밑바탕에 깔려 있다는 것이다. 노동자 스스로 임금을 20% 삭감하고 5000명의 새 일자리 창출을 결정한 2001년 폴크스바겐 경영협의회 합의가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그에게 한국에도 노동이사제가 잘 정착할 것으로 보느냐고 물었다. 그는 “(노동이사제는) 노·사 문화에 영향을 많이 받는다”며 “(한국에) 정착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말했다.

‘탁상경영’ 막고 애사심 향상 효과 #노사협력 세계 최하위권 한국선 #양측 갈등이 이사회로 번질 수도

독일 노동 전문가도 국내 도입에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보는 노동이사제 논의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국회엔 박광온 더불어민주당 의원 발의안 등 기업에 1인 이상의 노동이사 선임을 의무화하는 법 개정안만 3개가 제출돼 있는 상태다.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후보자도 최근 국회에 제출한 인사청문회 답변서에서 “노동이사제 도입 등 적극적인 법 개정 노력을 기울일 것”이라고 밝혔다. 문재인 정부 국정과제 중 하나인 노동이사제 도입이 경제라인 인선이 끝나면 속도를 낼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전문가들도 노동이사제는 ‘잘만 운영되면’ 긍정적인 효과도 적지 않다는 데엔 동의한다. 현장 아이디어를 반영해 ‘탁상 경영’의 폐해를 막고, 종업원의 애사심을 높이는 데도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이는 노·사 협력 문화가 자리 잡은 독일·스웨덴 등 유럽 일부 국가에서나 가능한 얘기란 지적도 동시에 제기된다. 한국경제연구원은 4일 ‘근로이사제 도입 현황과 문제점’ 보고서에서 “노·사 협력 순위가 최하위권(2018년 세계경제포럼 조사 140개국 중 124위)인 한국에 노동이사제가 도입되면 갈등만 심화할 가능성이 크다”고 밝혔다. 적대적 노·사 관계가 형성된 환경에서 노동이사는 갈등의 ‘중재자’ 역할보다는 노·사 갈등을 이사회 내부로 끌어들이는 역할만 담당하게 될 공산이 크다는 의미다.

한경연은 또 노동이사제가 정착된 유럽 국가들은 한국식의 ‘주주 자본주의’와는 사뭇 다른 시장경제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다는 점에도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독일의 경우 전체 기업 중 주식회사는 1% 수준에 불과하다. 대다수 기업이 주식시장보다는 은행에서 자금을 조달하는 게 특징이다. 정조원 한경연 고용창출팀장은 “독일에선 은행이 사업 자금을 대고 창업자와 노동자가 공동으로 기업을 운영하는 형태를 띠지만, 미국이나 한국에선 주주가 사업 자금을 대는 비중이 높기 때문에, 경영권은 주주 고유의 ‘사유재산권’으로 여겨진다”며 “독일식 노동이사제를 한국에 도입하면 주주 권한 침해로 갈등만 더 커질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김도년 기자 kim.dony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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