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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상용 “한·일 관계, 최고지도자 결단으로 파국 막아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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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2호 03면

[SPECIAL REPORT] 센고쿠 전 관방장관 추도사 한 최상용

최상용 전 주일대사가 중앙SUNDAY와의 인터뷰에서 ’문화 교류 활성화로 한·일 관계의 돌파구를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김경빈 기자]

최상용 전 주일대사가 중앙SUNDAY와의 인터뷰에서 ’문화 교류 활성화로 한·일 관계의 돌파구를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김경빈 기자]

한·일 관계가 악화일로를 치달으며 경색 국면이 심화되자 양국 외교가에서는 우려의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좀처럼 출구가 보이지 않는 ‘시계 제로’ 상태에서 탈피해 상생과 공존의 길로 나아갈 해법을 시급히 모색해야 한다는 주문도 잇따르고 있다. 1998년 김대중 대통령과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일본 총리가 서명한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도 그중 하나다. ‘현존하는 최고 수준의 한·일 정부 간 합의’로 불리는 공동선언의 정신을 되새겨 미래의 돌파구를 마련해 보자는 취지다. 당시 공동선언에 깊이 관여했던 최상용(고려대 명예교수) 전 주일대사를 지난달 29일 만나 한·일 관계의 바람직한 해법에 대해 들어봤다.

외교에 일방적 승리라는 건 없어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 좋은 선례 #문화 교류 활성화로 접점 찾아야 #앙숙 프랑스·독일 관계 참조할 만

한·일 관계가 심각한 위기다.
“국민감정과 국가 이익을 어떻게 하면 동시에 챙길 수 있느냐가 늘 숙제다. 보통 투 트랙이라고 하는데, 트랙은 선로 아니냐. 두 길이 나란히 가면 충돌하지 않아야 하지만 막상 현실은 그렇지 않다. 외교 문제에 역사가 들어가면 선악의 이분법이 작동하기 마련이다. 역사의 피해자는 끝까지 도덕적 우선권을 주장하게 되고, 이 같은 국민감정을 챙기다 보면 국가 이익을 놓치는 경우가 적잖다.”
그렇다고 역사를 외면할 수도 없지 않나.
“맞다. 그런데 역사에는 사실과 해석이란 두 차원의 문제가 존재한다. 확인된 사실은 당연히 존중받아야 하고 왜곡돼서도 안 된다. 역사학자 랑케도 ‘확인된 역사적 사실은 신과 같다’고 하지 않았나. 그만큼 논란의 여지가 없다는 뜻이다. 문제는 그 사실에 대한 해석에서 비롯된다. 실제로 선진국이든 후진국이든 한 나라의 국사는 예외 없이 ‘애국사’다. 그러다 보니 서로 자기 해석이 맞다고 다투게 되고 대사 소환에 국교 단절, 심하면 전쟁까지 가게 되는 거다.”
해법은 없나.
“역사 갈등으로 인한 외교적 파국을 피하려면 확인된 사실은 공유하되 해석 문제에서는 좀 더 관용하고 상호 인정할 필요가 있다. 이건 결국 최고지도자의 몫이다. 역사 문제와 외교 문제가 얽히고설킬 때는 큰 틀에서의 선택과 결단이 필수다. 이는 전문 관료에겐 결코 맡길 수 없는 영역으로, 양국의 최고지도자만 할 수 있다. 외교에 일방적 승리란 없다.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할 때 윈-윈이 가능하고, 그래야 국민감정과 국가 이익도 함께 챙길 수 있다.”
양국 정상도 그렇게 하고 있지 않나.
“레토릭은 이미 충분하다. 문재인 대통령도 투 트랙을 얘기했고,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도 미래지향적 한·일 관계를 강조하고 있다. 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레토릭에 그칠 뿐 실천이 뒤따르지 않고 있는 게 문제다. 그런 상태에서 대법원 판결과 위안부 논란이 이어지면서 상황이 더욱 악화되고 있다. 당분간 냉각기가 불가피할 듯싶다. 그사이에 양국 지도부가 현실을 되돌아보면서 책임 있는 입장을 내놓을 필요가 있다.”

그는 그러면서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이 평가받는 이유도 최고지도자의 결단이 동반됐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당시 공동선언에 따라 애니메이션 등 일본 대중문화를 개방하기로 했는데, 여론조사에서 80%가 반대하는 것으로 나왔다. 일본도 무라야마 담화와는 달리 가해자와 피해자를 명시했다는 점에서 집권 자민당과 보수층의 반발이 거셌다. 하지만 ‘20세기 말에 21세기 새로운 파트너십을 세우자’는 양국 정상의 의지가 워낙 강했다. 이 길만이 한·일 관계가 미래로 나아가는 출구라는 데, 상호 인정을 통해 평화를 실천하는 게 진정한 외교라는 데 두 정상의 인식이 일치했던 거다.”

일본은 공동선언을 어떻게 평가하나.
“지난 10월 일본 도쿄에서 열린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 20주년 기념 심포지엄에 참석했는데, 아베 총리가 축사를 했는데 깜짝 놀랐다. 아베 총리가 ‘공동선언 당시엔 (일본이) 너무 양보하는 것 같아 반대했는데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그게 바로 지도자의 결단이었다. 지금의 어려운 과제를 뛰어넘으려면 이런 정치적 리더십에 의한 큰 결단이 필요하다’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놀랍게도 양국의 최고지도자가 공동선언을 확고히 지지하고 있었던 거다. 이 접점을 잘 살려야 한다.”
보다 실질적인 타개책이 필요한 시점이다.
“상황이 어려울수록 큰 갈등 없이 추진할 수 있는 분야부터 챙겨야 한다. 문화 교류가 대표적이다. 문화만큼 탈이념화돼 있고 편견이 적은 분야도 드물다. 부적절한 망언은 과거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으며, 미래에도 있을 거다. 하지만 그런 언행이 아무리 계속되더라도 문화 교류의 끈만은 계속 이어가야 한다. 최근 방탄소년단(BTS) 공연을 둘러싸고 논란이 커지고 있는데 그럴수록 꿋꿋이 공연을 지속해야 한다. 학계에서도 문화는 그 자체가 비군사적 영역으로 평화지향적 속성을 갖고 있으며, 문화 교류를 통해 평화를 촉진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2005년 역사교과서 파동 때도 700건이 넘는 문화 교류로 양국 관계의 맥을 잇지 않았나.”
바람직한 한·일 관계의 모델을 찾자면.
“프랑스와 독일의 관계를 참조할 만하다. 두 나라는 역사적으로 불구대천의 원수지간이었지만 지금은 유럽연합(EU)을 이끌어가는 두 기둥이지 않나. 28개 동아시아 국가 중에서도 제대로 된 민주주의 국가는 사실상 한국과 일본뿐이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공유하는 두 나라가 힘을 합칠 때 최대의 시너지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아시아의 중심축을 중국이 독점하는 것보다는 한국과 일본이 서로 연대할 때 한·중·일 관계도 훨씬 건강해지고 동아시아 경쟁력도 한층 커질 수 있다.”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

1998년 10월 김대중 대통령과 오부치 게이조 일본 총리가 합의한 ‘21세기의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이다. 과거사에 대한 역사 인식을 비롯해 ▶정치 ▶안보 ▶경제 ▶인적·문화 교류 ▶글로벌 이슈 등 5개 분야의 협력 원칙을 포함한 11개 항으로 구성됐다. 특히 일본 총리의 과거사 반성과 사죄를 처음으로 담았다. 선언 2항으로 ‘오부치 총리대신은 일본이 과거 한때 식민지 지배로 인해 한국 국민에게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안겨주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이면서 이에 대하여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를 하였다’고 돼 있다.

선언은 또 전후 국제사회 평화와 번영을 위한 일본의 역할을 평가했다. 이 두 가지는 함께 채택된 ‘행동계획’의 토대가 됐다. 행동계획은 5개 분야 43개 항목의 구체적인 실천 과제를 적시한 것으로, 이 중엔 개발도상국 원조 분야의 협력도 포함됐다. 선언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한·일 양국의 이념과 가치, 대북정책에 대한 인식 공유 및 지지 표명 등도 담겼다.

박신홍 기자 jbje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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