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년 시발…하루 3백만이 이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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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총 연장 1백16·5㎞, 총 건설비용 2조4천억 원, 하루평균 이용객 3백만 명. 15년 동안「시민의 발」로 자리를 잡아온 서울지하철이 최초의 전면파업으로 휘청거리고 있다. 서울지하철은 어떻게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어떤 문제점을 안고 있는가.
서울지하철 건설은 3공화국부터 6공화국에 이르기까지 정권의 대 국민 선심용, 민심수습용, 또는 선거용 청사진으로「이용」돼 왔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3선 개헌직후인 70년 10월 1호선 등 지하철 5개 노선건설계획 발표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둔 77년10월 2호선 건설계획 발표, 80년 2월 3·4호선 동시착공 등 이 그러하고, 대통령선거를 눈앞에 둔 87년 11월 추가노선 건설계획 발표와 금년 3월초중간평가를 앞두고 1백66㎞ 신설계획을 발표한 것도 정치적 맥락과 분리해서 보기는 어렵다.
서울시 관계자들도 지하철 1, 2, 3, 4호선의 노선조차 교통량 평가 등 객관적 자료에 따르기보다는「정책적 배려」가 작용했다고 시인하고 있다.
서울지하철 건설의 필요성이 최초로 제기된 것은 65년 2월3일 발표된「시정 10개년 계획안」.
향후 10년 내 51·5㎞에 걸쳐 타당성조사를 한 뒤 14·88㎞를 1차로 건설한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보고서에는 1호선 서울역∼종로∼청량리, 2호선 서대문, 을지로∼성동, 3호선 갈현동∼퇴계로∼천호동, 4호선 우이동∼종로4가∼말죽거리 등 현재 노선의 골격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이 계획은 그러나 기술부족과 재원조달 불가능 등을 이유로 사문 화 됐다.
60년 2백44만 명의 서울인구는 70년 5백 52만 명으로 2배 이상 불어나 콩나물시루 버스 등이 본격적인 사회문제로 등장하자 서울시는 70년 6월 정원 29명의「조촐한」지하철건설본부를 발족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지하철 건설본부장은 김명년 현 지하철공사 사장.
70년 10월 지하철 1호선 건설계획을 공식 발표한 정부는 71년 4월12일 서울역∼청량리 9. 54㎞의 1호선 기공식을 갖는다.
시청 앞 광장에서 열린 기공식에는 고 박정희 대통령내외도 참석했으며 숭의여고 합창단이『지하철의 노래』를 부르는 가운데 5천여 개의 5색 풍선과 1천 마리의 비둘기까지 동원됐다.
1호선 건설은 국보1호 남대문과 보물1호 동대문의 붕괴위험을 내세운 문화재위원회의 항의와 시청∼종각 구간에서 동아일보사 건물 옆을 직각으로 우회하는 공사를 동아일보사로부터 응낙 받는데 1년여가 소모, 8개월 가량 공기가 지연돼 74년 8월15일 개통됐다.
또 전철구간은 2만5천V 교류인데 비해 지하철은 1천5백V 직류를 사용, 철도청과 건설본부사이에「직·교류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결국 직·교류 경용 전동차를 사용하는 것으로 결말이 났으며, 남 영역에서 서울역으로 들어갈 때 전동차전등이 잠시 흐려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서울을 기존 도심과 영동·영등포 등 다핵도시로 개발한다는 계획에 따라 나온 것이 2호선 순환선.
총 연장 48·8㎞에 달하는 2호선은 사업의 방대성과 재원문제 등으로 78년 3월 착공, 6년2개월 만인 84년 5월 완공됐다.
3· 4호선은 80년 2월 착공, 대형붕괴사고로 공사가 지연돼 85년 10월 완공됐다.
82년 4월 3호선 현저 동구간의 지반이 발파진동으로 내려앉으면서 시내버스가 추락, 인부 등 10명이 압사했으며 같은 해 7월 2호선 서소문구간 붕괴로 6명부상, 같은 해 10월 3호선 반포동 구간이 내려앉아 4명이 사망하는 등 대형참사가 잇따랐다.
그러나 대형참사에도 불구, 서울시장은 커녕 당시 김재명 지하철공사 사장조차 물러나지 않았다.
올림픽을 앞두고 완공된 2·3·4호선에는 역마다 인조석으로 지하동굴을 연출하거나(충무로 역)황 등 화강암으로 지하석조전을 방불케 하는(중앙청 역)등「초호화 판」이라는 비난을 받을 정도였다. 이후 지하철역이 새로운 문화·예술공간으로 등장하고 데이트명소로 자리잡기에 이르렀다.
착공 때 시세가 폭락한 공사주변 땅은 완공과 함께 금싸라기로 변하고, 지하상권이 형성되는가 하면 부천·안양 등 이 수도권 위성도시로 급격히 부상했다.
70년대 후반 유류파동 후 불황을 겪던 건설업계에 일감을 제공, 연간 2백만 명의 고용효과로 국내경제에「지하철특수」를 불렀다. 서울시는 그러나 3, 4호선건설로 2조1천억 원의 빚더미에 올라앉게 됐다.
81년9월1일 초대 지하철공사사장에 부임한 김재명씨(58·구속)는 전두환 전 대통령의 비호아래 서울시장도 마음대로 못하는「지하철왕국」에서 7년간「통치」했다. 5·17직후인 80년 6월 국방부 특검 단장으로 임명됐다가 전두환씨의 직접지시로 소장예편과 동시에 사장자리에 앉은 김씨는 군대식 운영과 군 시절 부하들을 특채,「김재명 사단」을 구성해 물의를 빚었다. <김두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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