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중앙시평

튜닝의 진화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5면

'튜닝(tuning)'이라는 단어를 놓고 카센터를 먼저 떠올린다면 영락없는 구세대다. 하긴 다들 한때는 그랬다. 조율 혹은 개조를 의미하는 튜닝은 라디오 수신 전파 조정이라는 본디 뜻에 충실하기보다 자동차의 성능이나 외관을 업그레이드할 때 더 자주 쓰는 말이었다. 하지만 요즘 20~30대에게 튜닝은 일상 생활용품 전반으로 확산되고 있다. 그리하여 신세대의 또 다른 이름이 바로 '튜닝족'이다.

수년 전 외장(外裝)에 그림을 그리는 일에서 시작된 휴대전화 튜닝은 이제 내부에 발광(發光)물질을 장착하거나 아예 형태를 완전히 바꾸는 것으로까지 나아가고 있다. 제대로 한번 튜닝하자면 수십만원까지 든다나. 신발 튜닝 역시 일대 성황이다. 아무런 무늬도, 색깔도 없는 운동화를 사다가 자기 스타일대로 직접 디자인하는 일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최근에는 물감.붓이나 펜.스프레이 따위를 신발 상자에 함께 넣어 파는 회사까지 등장했다.

튜닝 열풍은 컴퓨터.문구류.청바지 등으로 자신의 영역을 계속 넓히고 있다. 당연히 튜닝 관련 전문업체도 생겼고 유관 온라인 카페도 덩달아 늘었다. 물론 이런 스타일의 소비행위 자체는 별로 낯선 것이 아니다. 가령 소비자들이 가구를 장만할 때 반(半)가공 상태의 자재를 구입하여 완제품을 손수 조립하는 소위 DIY(Do It Yourself) 산업이 있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DIY는 목적이 비용 절감이나 취미생활이어서 요즈음의 '고객 완성형' 튜닝과 동일시하긴 어렵다.

무엇보다 요사이 튜닝은 대상을 주로 패션 분야에서 찾고 있다. 곧 자신의 수고를 보태 돈을 아끼겠다는 배려도 아니고 돈을 들여 제품 고유의 성능을 높이겠다는 기대도 아닌 것이다. 그저 남보다 달라지고 싶은 욕망과 다른 사람 앞에서 튀고 싶은 욕구가 감각적인 차원의 튜닝 행각을 경쟁적으로 재촉할 뿐이다. 그러기에 가격 면에서 종종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지는 경우도 많은데 튜닝 사회에서 이는 전혀 놀랍지 않다.

사실 차별화된 소비는 인간의 본능에 가깝다. 특히 프랑스 사회학자 장 보드리야르가 말했듯이 사회가 풍요로울수록 상품은 사용가치를 넘어 상징가치로서의 의미를 더 가진다. 무릇 소비란 경제적 영역과 문화적 차원에 걸쳐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자기 완성형' 튜닝은 대량 소비사회나 브랜드 전성시대에 대한 의미 있는 도전으로 생각될 수도 있다. 자아를 고집하고 각자의 개성을 추구하는 일종의 정체성 전략 같은 것이다. 아니면 소비사회의 절정에서 우리는 장인(匠人)정신의 퇴조를 못내 아쉬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와 같은 모습의 튜닝 시대가 소비사회의 극복이나 청산으로 이어질 공산은 거의 없어 보인다. 오히려 그것은 소비주의 이데올로기를 보다 심화할 개연성이 높다. 왜냐하면 튜닝을 통한 개인의 구별 짓기 방식 자체가 여전히 집단적 유행에 편승하고 상업적 자본에 심히 종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은 자본주의 소비문화에 대한 또 다른 투항(投降)에 불과하다. 아마도 작금의 튜닝 붐은 소비가 미덕이고 행복이라는 소비사회의 덫에 우리를 더 깊이 가두고 말 것이다.

사물 앞에서 항상 궁핍하고 부족하게 만드는 것이 현대 소비사회의 구조적 특징이라면 근본적인 해법은 우리 삶 자체의 모드를 '소유와 사유'에서 '존재와 공유'로 바꾸는 길밖에 없다. 그러나 이를 위해 지금 당장 내가 해야 할 일은 너무나 벅차고 막연하다. 그런 만큼 구세대가 문득 그리워하는 풍경은 지난 학창 시절 고작 연탄불에 교모(校帽)를 그슬리는 것에서 나만의 멋과 개성을 찾았던 소박한 소유 의식(儀式)이다. 돈으로 하는 튜닝이 전부도 아니고 최상도 아니다. 튜닝은 다만 진화할 뿐이다.

전상인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