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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KS 우승 일군 힐만 “일보다 가족, 성적보다 선수가 소중”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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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0호 12면

한국시리즈 3차전이 열린 지난 7일 인천 SK행복드림구장에서 만난 힐만 감독이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수화를 만들어 보이고 있다. 반바지를 입은 그는 ’하체가 나오면 안 된다“며 웃었다. [김경빈 기자]

한국시리즈 3차전이 열린 지난 7일 인천 SK행복드림구장에서 만난 힐만 감독이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수화를 만들어 보이고 있다. 반바지를 입은 그는 ’하체가 나오면 안 된다“며 웃었다. [김경빈 기자]

2017~18년 프로야구 SK 와이번스를 이끌었던 트레이 힐만(55) 감독이 미국으로 돌아갔다. 지난 16일 출국한 그는 한국시리즈(KS) 우승 반지를 손에 넣었고, 외국인 감독 최초 KS 우승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한국시리즈 제패 #선수들 토닥여주고 때론 강한 자극 #지혜로운 말로 SK 거포군단 완성 #미국으로 돌아가 #아버지·새어머니 모시러 고향으로 #일본서도 우승, 메이저리그행 유력 #한국 선수들 훈련 #학생 땐 운동보다 공부에 더 집중 #시간 관리 잘하면 조화시킬수 있어

올 시즌 SK는 페넌트레이스 2위로 플레이오프(PO)에 직행했다. PO를 앞두고 힐만 감독은 “이번 시즌을 끝내고 미국으로 돌아간다”고 미리 사임을 발표했다. “연로하신 아버지가 알츠하이머에 걸린 새어머니를 돌보고 계신다. 가족 곁에 가까이 있고 싶다”는 게 한국을 떠나는 큰 이유였다. SK는 넥센 히어로즈를 3승2패로 꺾고 KS에 올랐다. 페넌트레이스 1위 두산 베어스를 맞아 SK는 4승2패로 시리즈를 끝냈다. 잠실에서 열린 6차전, 패색이 짙은 9회 초 투 아웃에 최정이 극적인 동점 홈런을 터뜨렸다. 연장 13회 초에는 한동민이 결승 솔로 홈런을 잠실구장 가장 먼 곳에 꽂았다. 13회 말에 등판한 에이스 김광현이 최고 시속 154㎞의 광속구로 경기를 끝냈다.

SK는 포스트시즌 내내 큰 것 한 방으로 경기를 뒤집는 명승부를 연출했다. 힐만 감독은 2006년 재팬시리즈 우승(니혼햄 파이터스)에 이어 한국시리즈까지 제패했다. 메이저리그 캔자스시티 로열스(2007~2010) 감독을 역임했던 힐만을 잡으려고 메이저리그 몇 팀이 움직이고 있다고 한다.

이 인터뷰는 KS 3차전이 열린 지난 7일 SK 와이번스 감독실에서 진행했다. KS 중간에 특별히 시간을 내준 힐만 감독은 “기사는 한국시리즈가 끝난 뒤에 내보내 달라”고 신신당부했다. 독실한 기독교인인 힐만 감독과의 인터뷰는 미국에서 온 유명 목사님을 모신 자리 같았다. 그는 삶과 신앙,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사람이었다.

독실한 기독교인, 빈볼 응징 안 해

힐만 감독이 한국시리즈·재팬시리즈 등 중요 경기 때 호주머니에서 꺼내 보는 쪽지. 구약성경 이사야 40장 31절 말씀을 적었다. [김경빈 기자]

힐만 감독이 한국시리즈·재팬시리즈 등 중요 경기 때 호주머니에서 꺼내 보는 쪽지. 구약성경 이사야 40장 31절 말씀을 적었다. [김경빈 기자]

많은 팬들이 이별을 아쉬워 하지만 가족 때문이라고 하니 어쩔 수 없다며 받아들인다. 삶의 우선순위가 하나님-가족-일 순이라고 하던데.
“부족한 점이 많지만 그 우선순위가 맞다. 돌이켜 보면 일에 너무 많은 시간을 쏟은 게 아닌가 싶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건 사랑인데. 가족과 시간을 많이 못 보낸 게 아쉽다. 이젠 아버지·새어머니와 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다.”
미국으로 돌아간 뒤 ‘메이저리그 A팀, 힐만 감독 영입’이라는 기사가 뜬다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미국 복귀해서 일자리를 구했다고 하면 팬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민감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공식적으로 나온 건 없지만 11월 말에는 자리를 잡았으면 좋겠다. 메이저리그 팀들과 많은 네트워크가 있고, 아직 일자리가 남아 있다. 사실 SK 오기 전만 해도 감독으로서 야구는 더 이상 안 할 생각이었다. 하나님의 뜻이 있었기에 한국에 왔고, 앞으로도 그분 뜻대로 움직이겠다.”
경쟁·승부라는 스포츠의 속성이 용서·화해 같은 기독교의 본질과 충돌하는 경우도 많지 않나.
“좋은 질문이다. 그래서 중요한 게 삶의 밸런스를 맞추고, 모든 것을 심플하게 보는 거다. 이런 충돌이 있을 만한 부분에서 네 가지를 생각한다. 성경 말씀대로 하고 있나, 주위 사람을 사랑하고 있나, 코치로서 잘 가르치고 있나, 선수와 팀을 위해 강하고 탄탄한 기반을 만들고 있나.”
상대 투수가 우리 팀 타자에게 빈볼(머리를 향하는 위협구)을 던졌다. 응징해야 하나, 용서해야 하나.
“상황에 따라 다르다. 심판이 제재나 경고를 하지 않는다면 우리도 당한 것에 대한 메시지를 상대에 전달해야 한다고 본다. 감독으로서 선수를 보호하겠다는 것도 보여줘야 한다. 그 타이밍을 잡아서 명확한 메시지를 표현하는 게 감독의 역할이다.  이번 시즌 중에도 빈볼에 맞은 적이 몇 차례 있었지만 응징하지는 않았다. 메시지 전달을 안 해도 선수들이 끝까지 참아내기를 바랐다.”
SK를 홈런군단으로 만든 비결이 뭔가.
“내가 직접 한 건 없다. 스카우트팀에서 좋은 선수를 뽑았고 코치들이 선수들을 잘 준비시켜왔다. 한동민이 제대하고, 이재원이 성장 사이클을 탔고, 로맥과 최정도 꾸준히 활약했다. 이 시기에 그 선수들에게 기회가 갔고, 그걸 선수들이 살려낸 거다.”
선수들에게 지속적으로 강조한 메시지는.
“게임은 많은 것을 가르쳐준다. 계속 배워나가고 끝까지 야구를 하라. 그리고, 변화를 두려워하지 말라. 야구뿐만 아니라 삶에서 변화가 필요하다고 느낀다면 필요한 변화를 가져가라.”
말의 중요성을 강조하던데.
“토닥토닥 껴안아줘야 할 선수가 있고, 자극을 주는 ‘강한 사랑’이 필요한 선수도 있다. 젊은 선수들에게 좀 더 나은 방법으로 다가가도록, 지혜로운 말을 하게 해 달라고 늘 기도한다.”
한국 야구의 독특한 점은.
“팀의 단합이 잘 된다. 성공하고 이기려는 의지가 어떤 팀에서 경험한 것 이상으로 최고다. 또 응원문화가 독특하고 재미있다. 노래도 하고, 치어리딩과 응원단장도 있다. 메이저리그에서는 볼 수 없고 NFL(미국 프로풋볼)에서나 느낄 수 있는 풍경이다.”

“한국 팬·친구들 만나러 다시 올 것”

한국시리즈가 끝난 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보충 질문을 이메일로 보냈다. 힐만 감독은 출국 직전 정신없이 바쁜 와중에도 하루 뒤에 답장을 보내 왔다.

팔꿈치 수술을 받았던 김광현의 등판 일정을 확실히 지켜줬다. 성적보다 선수 건강이 먼저라고 했는데.
“부상 경력이 있는 투수는 자신이 느끼는 몸 상태와 사진(MRI 등)을 비교하며 면밀히 살펴야 한다. 같은 통증이라도 소어니스(Soreness·근력운동 후 자연스러운 통증)와 페인(Pain·조직 손상으로 인한 통증)은 전혀 다르다. 페인이 나타날 경우 부상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더 꼼꼼히 체크한다.”
한국 선수들은 팀과 선배에 대한 충성심이 높지만 지나치게 순종적이 될 수도 있는데.
“우리 팀에선 선배와 후배 간에 커뮤니케이션이 활발하고, 베테랑 선수에 대한 존경심이 남달랐다. 베테랑들은 후배 선수들이 (선배로부터) 적절하지 못한 대우를 받았다고 느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알려준다. 이런 것들이 ‘상호존중’을 만들어 낸다고 믿는다.”
한국의 학생 야구 선수들은 훈련량이 너무 많아 공부에 어려움을 겪는다.
“난 언제나 공부가 운동보다 중요하며, 시간 관리만 잘하면 그 둘을 조화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 인생에서 가장 열심히 공부해야 할 시기에는 공부에 집중해야 하고, 그래야 좋은 선수 겸 학생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힐만 감독은 “많은 사랑을 주신 한국 팬들께 진심으로 감사 드린다. 친구들을 만나러 다시 올 거다. 그때까지 팬들과 선수들 모두 건강하기를 기원한다”고 작별 인사를 했다. “좋은 환경을 만들어 준 SK그룹에도 감사 드린다”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머리카락 기부하는 ‘소아암 아동 돕기 이벤트’ 제안해 실천

산타 복장으로 소아암을 앓는 김진욱 군의 교실을 방문한 힐만 SK 와이번스 감독. [사진 SK 와이번스]

산타 복장으로 소아암을 앓는 김진욱 군의 교실을 방문한 힐만 SK 와이번스 감독. [사진 SK 와이번스]

소아암 어린이 김진욱 군이 SK 야구단의 승리를 기원하며 보낸 편지. [사진 SK 와이번스]

소아암 어린이 김진욱 군이 SK 야구단의 승리를 기원하며 보낸 편지. [사진 SK 와이번스]

지난 8월 10일, 인천 SK행복드림구장에서 힐만 감독은 긴 머리카락을 잘랐다. 부인 마리가 직접 가위를 들었다. 소아암 아이들을 돕기 위한 이벤트였다.

지난해 8월 힐만 감독이 구단 측에 “머리를 길러서 기부하고 싶다”고 제안했다고 한다. 김광현도 힐만 감독의 권유를 받아 머리를 기른 뒤 지난 3월 먼저 머리카락을 잘랐다.

힐만 감독은 “머리를 길러 기부하겠다는 건 그렇게 어려운 결정은 아니었다. 소아암은 완치율이 매우 높은데 이 사실이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걸 사람들에게 심어주는 게 중요했다. 필요하다면 완전히 삭발을 해도 상관없었다”며 웃었다.

힐만 감독은 한걸음 더 나아가 소아암의 일종인 ‘시신경교종(시신경에 발생하는 종양)’을 앓고 있는 김진욱(11) 군과 결연을 맺었다. 지난 7월 25일 무더위 속에서 산타 복장에 수염을 붙이고 진욱 군의 교실을 방문해 선물을 전달했다(위 사진). 진욱 군은 11월 2일 PO 5차전 시구자로 나섰고, 라커룸에 ‘SK 와이번스 한국시리즈 우승까지 진욱이랑 GO GO!’라고 쓴 편지(사진)도 전달했다.

진욱 군의 어머니는 “진욱이가 표정이 밝아졌고 활달해졌어요. 우리 가족 모두가 힐만 감독님 광팬입니다. 감독님은 가식이 아닌 진짜 마음으로 사람을 대해주셔서 감동받았어요”라고 말했다.

정영재 스포츠선임기자 jerr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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