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밤의 재즈 수첩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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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9호 34면

김하나의 만다꼬

나이가 드니 바람에 기억이 실려 온다. 십수 년 전, 딱 요즘처럼 서늘한 바람이 불며 가을이 깊어가던 때였다. 당시 나는 불 같은 사랑을 하다 헤어지고 여러 달째 서글픈 마음을 달래던 중이었다. 일요일 밤 자정 즈음 혼자 차를 몰고 금화터널을 통과해 서촌에 있는 집으로 가던 길에, 평소 잘 듣지 않던 라디오를 켰는데 마침 어떤 곡이 막 시작하고 있었다.

“Only a fool  
Like fools before me ”  


어느 남자 가수의 부드럽고 진하디 진한 목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완전히 사로잡혀 버렸다. 누구와도 닮지 않은 그 목소리와 휘몰아치는 여러 대의 현악기들과 색소폰 소리가 차창 밖 단풍으로 물든 가로수와 뒤엉켜 깊어가는 가을의 심상과 절절하게 맞아떨어졌다. 물론 실연자의 헛헛한 마음과도. 눈물이 왈칵 쏟아지려 해서 핸들을 꽉 움켜쥐었던 게 지금도 생생히 기억난다. 온 신경을 집중해서 음악을 들으며 터널과 고가도로를 지났다. 음악이 끝나고 진행자가 곡 소개하는 걸 잘 들어두려 했는데 딴생각을 하다 뒷단어가 ‘fool’이라는 것만 들었다.

다음날 회사에 있다가 그 곡을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정 무렵이었고 주파수는 93.1 MHz일 확률이 컸다. 인터넷으로 뒤져본 결과 ‘황덕호의 재즈 수첩’이라는 프로그램인 듯했고 간밤의 선곡 리스트를 훑어보니 과연 ‘Ordinary Fool’이라는 곡이 있었다. 가수는 멜 토메(Mel Torm<00E9>). 당시엔 스트리밍 서비스가 시원찮았기에 CD를 사려고 찾아봤지만 국내 어디에서도 그 곡이 수록된 음반을 구할 수가 없었다. 지금이었다면 아마존에 주문했겠지만 당시엔 그것도 쉽지가 않았다. 수입반과 중고 음반을 구하러 종종 이용하던 상아레코드에 중고 딱 한 점이 있음을 찾아냈는데 혹시 다른 곳에서 신품을 구할 수는 없을까 하여 재즈 전문 음반샵인 ‘애프터아워즈’라는 곳 게시판에 문의를 남겼다. 오래지 않아 사장님의 친절한 답변이 달렸다. 지금 그 앨범은 본인의 가게에도 없고 국내 인터넷에선 단 한 곳에 중고 음반만 있는 듯하다며 내가 찾았던 상아레코드의 주소를 알려준 것이다. 없다고만 하면 될 텐데 굳이 다른 매장에 있는 중고 음반까지 찾아주다니 참 고마운 일이었다. 음반을 구하려는 마음을 잘 알고 어떻게든 도와주려는 마음.

나는 그 음반을 구입했고 지금까지도 바람 서늘한 이 무렵이 되면 한 번씩 꺼내어 듣는다. 오랫동안 내게 실연의 슬픔을 떠올리게 했던 곡이었지만 훗날 새로운 사람을 만나 함께 들으며 행복한 기억도 갖게 되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재즈 음반 전문 샵 ‘애프터아워즈’를 운영하는 사람의 이름이 황덕호였다. ‘황덕호의 재즈 수첩’을 진행하는 재즈 전문가 황덕호 씨가 직접 차린 음반 매장이었던 것이다. 결국 그 밤 그 노래를 선곡해 내게 처음 들려주었던 이도, 내가 지금까지도 애청하는 음반을 구할 수 있게끔 자기 일처럼 친절히 찾아서 다른 샵을 알려주었던 이도 같은 사람이었던 셈이다.

요즘도 나는 라디오를 잘 듣지 않지만 일요일 밤이면 ‘황덕호의 재즈 수첩’을 틀어놓고 일주일을 차분히 마무리한다. 음악을 듣고, 구하고 싶은 마음을 잘 아는 사람이 진행하는 그 프로그램을. 늘 멋진 선곡과 담담한 말투가 듣기 좋다. 1999년에 시작해 올해로 19년째가 되었다니 참으로 근사한 일이다.

브랜드라이터. 예스24 팟캐스트 ‘책읽아웃’ 진행자.『 힘 빼기의 기술』을 쓴 뒤 수필가로도 불린다. 고양이 넷, 사람 하나와 함께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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