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독 가수 동독 공연"4주전 매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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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동베를린의 공연협회를 찾아 나선 지난달 20일. 무겁고 낮게 드리운 유럽의 겨울 하늘처럼 잿빛의 음울한 건물들 사이를 기웃거리며 라이프치거 가를 오르내리다 말고 문득 서베를린으로 되돌아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불과 수백m 거리에 동서베를린의 관문이랄 수 있는 찰리 검문소가 있으니 마음만 먹으면 불과 몇 분 이내에 그 삭막하고 무표정한 도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밝은 웃음으로 반겨>
독일사람들이 대체로 밝고 명랑한 편은 아니라지만 길을 물어도 아무말없이 손가락으로 만 가리키고 잔돈을 거슬러 주는 택시운전사도 그 흔한『비더첸』(안녕) 한마디 없으니 왠지 가슴이 짓눌리는 듯한 기분을 주체하기가 힘들었다. 열병식이라도 하듯 일정한 간격으로 반듯반듯하게 세워둔 주차장의 승용차들조차 통제사회의 한 단면처럼 느껴진 것은 방금 자유분방한 서구사회에서 건너온 방문객의 선입견 탓이었을까.
마침「동독공연협회」라는 작은 간판이 눈에 띄는 바람에 마구 두근거리는 가슴을 심호흡으로 진정시키며 정문을 들어섰다. 그동안의 팽팽한 긴장감을 순식간에 씻어준 것은 공연협회 「한스·에머리히」회장의 환한 웃음.
『동서독의 교류에서 예술가들의 역할은 막대합니다. 같은 민족으로서의 동질성을 확인할 수 있는 공감대를 이루는데 가장 자연스럽고 효과적인 방법은 뭐니뭐니해도 문화교류가 최고니까요』
그는 올해도 동서독에서 각각 10여 개의 음악·연극·무용 등 공연단체가 서로 오가며「함께 즐긴= 무대」를 만들게 된다고 했다. 물론 서독뿐 아니라 동서진영의 여러 나라들과 문화교류를 하고 있지만 서방세계와의 문화교류 가운데 서독과의 교류가 약40%를 차지한다고.
국가보다는 각 공연단체의 수준이나 조정 조건 등을 먼저 고려하지만 항상 서독과의 교류가 제일 많은 편이라는 것이다.
한반도의 분단 상황을 갈 알고 있는 「에머리히」회장은 『한국도 남북간의 문화 교류를 일단 시작해보면 그 효과를 금방 알게 될 것』이라면서『물론 정부당국의 이해와 정책적·재정적 지원이 대전제』라고 덧붙였다.
서독인들이 동독에서 공연할 경우 동독관객들의 반응이 다른 외국 공연단체들의 공연 때와 어떻게 다르냐고 묻자『예컨대 오늘 저녁 무용극장에서 열리는 서독 가수「라인힐트·호프만」의 음악회 입장권이 이미 4주일 전에 매진됐을 정도』라고 했다.『오후에 공연장 앞에 가보면「입장권 구함」이라고 쓴 피킷들을 숱하게 볼 수 있을 것』이라니 그 인기도를 짐작할 만 하다.
지난해 12월 동독작가 「베르롤트·브레히트」의 뮤지컬 『서푼짜리 오페라』가 서울에서 공연됐다니까 한국관객들의 반응을 궁금해하면서 매우 반기는 표정.

<입장료 2천원 남짓>
「브레히트」가 세운 베를린 앙상블 극장은「브레히트」작품들을 주로 무대에 올리는 것으로 유명하지만 마침 그날은 공연이 없다며 유감스러워했다.
그밖에 볼만한 공연을 추천해달라니까 『좋은 공연이야 많지만 입장권을 구하는가 문제』라면서「입장권 구함」이란 피킷을 들고 공연장 앞에서 한시간 줄서 있을 용의가 있냐고 물었다.
공연협회를 나와 브란덴부르크 문으로 향했다.
동독의 공연 예술을 직접 감상할 가능성은 거의 희박했지만 브란덴부르크 문에서「박물관의 섬」까지 이어지는 운터덴린덴가를 따라가며 이 중심가 양쪽의 코믹 오페라극장·막심 고리키 극장·국립 오페라 하우스를 기웃거려볼 생각이었다.
한반도의 남북한 땅을 모두 밟아본 사람들은 어떤 느낌일까하는 상념에 젖으며 국립 오페라 하우스까지 걷다가 마주친 또 하나의 행운! 「차이코프스키」의 발레 『호두까기인형』을 공연한다는 포스터를 들여다보고 있는데 『무얼 도와드릴까요?』하는 말소리가 들렸다.
4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거구의 동독인이 활짝 웃고 있었다.
입장권을 구하고 싶다니까 『쉽지는 않겠지만 일단 알아봅시다』며 국립 오페라하우스 입장권 판매소 안으로 들어간 것만으로도 감격스럽도록 고마운 참인데 『당신은 참 운이 좋군요』라며 3×7cm크기의 분홍색 입장권을 흔들며 나타났다. 누군가 급한 사정 때문에 방금 표를 반환하고 있더라는 것이다. 입장료는 5마르크 20페니히라니 2천원 남짓.
국립 합창단원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그의 친절은 그쯤으로 끝나지 않았다. 낮 공연이 시작되는 오후 3시30분까지는 시간이 넉넉하다면서 「히틀러」가 수많은 책들을 불살랐던 바벨광장, 파시즘과 군국주의의 희생자들을 위한 기념관 등을 안내해 주었다. 공연시간이 가까와지자 국립 오페라 하우스 로비에서 주스까지 한잔 대접하고는 2층 발코니 맨 앞줄의 내 좌석까지 바래다주고서야 떠났다.
그날 공연이 어린이들 취향에도 알맞는 내용이라서 그런지 어린이들이 객석의 30∼40%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수백명의 어린이들이 모여 있는 공연장치고는 아주 조용한 편이였지만 동화의 세계로 이끄는 듯한 서곡이 연주되기 전까지는 기분좋은 술렁거림 속에서 가만 가만한 속삭임과 맑은 웃음소리들이 곳곳에서 들렸다. 상아색의 밝은 벽이 금박으로 장식되어 화사하기 짝이 없는 오페라 하우스에서 「오프만」의 동화를 소재로 한 「차이코프스키」의 발레를 즐기는 맛이라니! 길을 걸으며 느끼던 삭막함과 억눌린 듯한 답답함은 어느덧 씻은 듯 사라지고 기분 좋은 환상의 세계에 젖어들였다.
호두까기인형이「클라라」의 도움으로 생쥐의 임금님을 물리치고 주문이 풀려서 아름다운왕자로 변하자 어른들도 어린이들과 함께 좋아라고 손뼉치며 환호성. 왕자로 변한 호두까기인형이「클라라」를 과자의 나라로 안내하는 동안 그야말로 천사의 목소리를 연상시키는 소년소녀 합창단의 허밍코러스가 관객들을 사로잡았다.

<마음내키면 찾아와>
별사탕의 춤·트레파크 (러시아 농민의 춤)·아라비아의 춤·중국다의 춤·갈잎피리의 춤·꽃의 원무곡이 차례로 이어질 때마다 관객들은 온통 박수갈채. 흥분의 도가니 속에서 2막3장의 발레가 모두 끝나고 나서도 공주가 된 「클라라」역의 「베티나·티엘」과 왕자가 된 호두까기 인형역의 「랄프·스팅겔」은 환호에 답하기 위해 수없이 무대위로 달려나봤다.
부모와 나란히 앉아 공연을 즐기는 어린이들 못지 않게 행복해 보였던 사람은 휴식 시간에 초컬릿을 나눠먹던 60대의 노부부. 서 베를린에 산다는 그들은 동베를린 교외에 사는 친척을 만나고 동독의 수준 높은 발레도 감상할 겸 그날 아침 기차로 동베를린에 봤다고 했다.
기차 삯(서베를린의 동물원 역에서 동베를린의 프리드리히 역까지 2마르크 70페니히)파 비자 발급료 5마르크를 들이더라도 동독에서는 공연 입장료와 음식값이 서독보다 훨씬 싸기 때문에 언제라도 마음만 내키면 동베를린에 온다고 했다. 『그렇지만 우리처럼 동독사람들도 자유롭게 서독을 드나들 수 있기까지는 얼마나 더 기다려야될지 모르는 일』이라며 사뭇 아쉬운 표정.
서베를린으로 돌아오는 버스에서 만난 서독 대학생은 동독의 책값이 서독보다 훨씬 싸기 때문에 이따금 동베를린으로 책을 사려간다고 했는데 검문소에 대한 농담이 걸작이다. 『동독 경비대는 검문소를 통과하는 사람들의 안경까지 벗어보게 하면서 신분을 확인하고 거의 밑바닥과 짐칸까지 샅샅이 뒤져가며 삼엄하게 구는데 비해 서독 측 연합국 경비대는 누가 지나가건 말건 거들떠보지도 않는 이유를 아세요? 라고 묻기에 『글쎄요』 했더니 『자본주의국가의 경비대는 「플레이보이」따위나 읽느라고 우릴 검문할 틈도 없기 때문』이라고 익살.
어쨌든 동서독간에는 이렇게 왕래가 가능하다는 사실이 몹시 부럽다고 했더니『그래도 독일이 완전히 통일되기까지는 지금까지 기울여온 노력과 세월이상의 댓가가 더 필요할 것』이라며 이내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동베를린=김경희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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