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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용 한 풀었지만 일본 반박할 외교전은 이제 시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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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범기업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한 강제징용 피해자들과 시민단체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활동가들이 10월31일 오후 광주 동구 지산동 광주고등법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이들은 전날 대법원 배상 판결에 따른 입장을 발표했다. [연합뉴스]

일본 전범기업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한 강제징용 피해자들과 시민단체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활동가들이 10월31일 오후 광주 동구 지산동 광주고등법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이들은 전날 대법원 배상 판결에 따른 입장을 발표했다. [연합뉴스]

일본 기업이 강제징용 피해자에게 배상해야 한다는 대법원 판결 이후 정부에 숙제가 떨어졌다. 일본이 부정해온 식민 지배의 불법성을 대법원이 직접 재확인했다는 점에서 피해자들을 위한 정의를 실현한 게 판결의 의의다. 하지만 향후 ‘한국이 골대를 옮긴다’는 일본의 비판 논리에 맞서 국제사회를 설득해야 하는 외교전은 이제 시작됐다.
대법원이 1965년 맺은 한일 청구권 협정을 통해 강제징용 피해자 개인의 손해배상 청구권이 해결되지 않았다고 판단한 근거는 협정에 일본 식민 지배의 불법성이 명시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불법성이 명시되지 않은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당시 청구권 협정에 일본 식민 지배의 불법성을 명시하지 못한 데는 한국이 처했던 국제외교적 상황의 영향이 컸다. 대법원 판결문에도 나와 있듯이 한일 협정의 시작점이 된 샌프란시스코 조약(1951) 4조는 식민 지배 피해에 대한 배상이 아니라 재산상 채권ㆍ채무 관계 처리만을 규정하고 있다. 또 6ㆍ25 전쟁 발발 등으로 아시아에서의 반공 저지선 형성을 위해 한ㆍ일 수교가 필요했던 미국의 압박도 거셌다. 애초에 미국이 주도한 샌프란시스코 조약에서 일본의 불법 식민 지배 행위를 관대하게 넘어가준 것도 이 때문이었다.

따라서 당시엔 일본으로부터 전쟁 배상과 식민지배에 대한 명시적 보상을 받을 길이 사실상 막혀 있었다는 게 중론이다. 53년이 지나 당시의 이런 국제외교 현실은 잊은 채 한국이 법적 구속력이 있는 국가 간 협정(한일 청구권협정)을 부정했다는 식으로 국제 사회에 비칠 여지가 있는 셈이다. 한 전직 외교관은 “국제사회에서 보기에 한국은 상대국과 조약을 맺어놓고도 국내적 판단이 달라지면 얼마든지 뒤집을 수 있는 나라처럼 보일 수도 있다. 꼼꼼하게 대응하지 않으면 한ㆍ일 관계를 넘어 한국의 국제적 신용과 신뢰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청구권협정 협상 과정에서 정부가 강제징용 피해자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한국 측은 ‘대일 청구 요강’을 제출했는데, 여기 나와 있는 8개 조항 중 5항에서 ‘피징용 한국인의 미수금 및 기타 청구권을 변제하라’고 요구했다. 61년 회담에서는 구체적으로 피해 생존자 1명당 200달러, 사망자 1명당 1650달러씩 총 3억 6400만 달러를 책정해 일본에 전달했다. 한국은 이를 포함, 총 12억 2000만 달러를 요구했다.

하지만 자금의 성격을 두고 일본은 경제협력 명목만 명시하자고 주장하고, 한국은 식민 지배 청산의 의미가 있어야 한다고 맞섰다. 결국 협정 제목에 어느 하나만 넣지 않고 ‘재산 및 청구권 문제의 해결 및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으로 한 것은 한·일 양쪽 입장을 모두 반영한 절충안이었다. 협정 타결 이후에도 한국은 “실질적으로는 배상 성격이라는 것이 우리 견해”(청구권 협정 비준 시 장기영 경제기획원 장관 국회 발언)라고 하고, 일본은 “한국에 제공한 자금은 어디까지나 경제협력으로서 행해졌을 뿐”(‘일한조약과 국내법의 해설’ 책자)이라고 서로 딴소리를 하며 사실상 상대방의 입장을 묵인했다.

대법원도 한국이 강제징용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을 요구한 사실은 인정했다. 하지만 ▶구체적 금액을 책정해 요구한 것은 정부의 공식 견해가 아니라 교섭 담당자가 한 말에 불과하며 ▶피징용자의 고통을 언급한 것은 협상에서 유리한 지위를 점하려는 목적에 불과하고 ▶실제 받은 금액(3억 달러)이 요구액에 훨씬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위자료 청구권도 적용해 받은 것이라고는 도저히 보기 어렵다고 밝혔다.

그러나 일본은 ‘국제법 위반’까지 들먹이며 대법원 판결이 청구권 협정에 반하다고 반발하고 있다. 대법의의 이같은 판결 근거가 국제법 및 외교 협상의 관례를 반영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한 국제법 전문가는 “요구했던 돈을 다 받지 못했다고 해서 자금의 성격이 바뀌지는 않으며, 실제로 교섭 과정에서 처음 요구한 액수가 관철되는 일은 거의 없다”며 “따라서 교섭 담당자가 하는 말은 다 훈령을 받는 정부의 견해이므로 개인적인 발언으로 치부하는 것은 무리라는 의견이 나올 수 있는 만큼 이를 극복할 외교적 논리를 만들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신각수 전 주일 대사는 “한국 정부 예산으로 피해 보상에 나선다면 판결 취지에 어긋나고, 일본 기업에 대한 강제집행이 이뤄진다면 외교 분쟁을 피할 수 없는 어려운 상황”이라며 “한·일 간에 식민 지배의 불법성 인정을 둘러싼 갈등이 다시 떠오르거나 과거사 논쟁이 재점화할 수 있기 때문에 신중한 외교적 대응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정부는 로키로 일관하고 있다. 국무총리를 주축으로 관계 부처와 민간 전문가가 참여해 대책을 마련하겠다는 입장만 반복하고 있다. 강경화 장관은 지난달 31일 고노 다로(河野太郞) 일본 외상과의 통화에서도 “판결과 관련한 사항에 대한 면밀한 검토를 토대로 제반 요소를 조합적으로 고려해 대응방안을 마련해나갈 예정”이라는 기본 입장만 다시 확인했다. 유지혜 기자 wisepe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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