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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바람을 부르는 바람개비 4. 강아지 포대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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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언니가 학교에 간 사이 언니가 아끼는 인형을 안고 어머니와 포즈를 취했다.

멀리서 아스라이 들려오는 개 짖는 소리. 일반적으로 정겨운 고향의 정취련만 나에겐 그렇지 못한 가슴 아린 추억이 있다.

내가 어렸을 때 우리 집에는 강아지와 고양이가 여러 마리 있었다. 모두 버려진 동물들로, 다리가 부러지거나 심한 상처를 입어 내가 길에서 데려다 키운 것들이었다.

어느 날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마을 어귀 개울가에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나 역시 호기심이 일어 아이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곳에 닿자마자 나는 아이들에게 버럭 소리를 지르며 심하게 화를 냈다. 아이들이 다리가 부러져 절룩이는 강아지를 막대기로 쿡쿡 쑤셔대고, 돌을 던지며 키득거리는 게 아닌가. 강아지는 겁을 잔뜩 집어먹고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나는 아이들을 밀쳐내고 강아지를 안았다. 주인 없는 강아지여서 냄새가 심하게 나고 더러웠다. 나는 녀석을 꼭 끌어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물을 따뜻하게 데워 깨끗이 씻겨준 뒤 부러진 다리에 부목까지 대고 붕대를 정성스레 감았다. 그리고는 친동생처럼 등에 업고 놀러 다녔다. 이런 내가 기특해서였을까, 아니면 힘들게 보여서였을까. 어머니는 강아지 포대기를 만들어 주셨다.

"강아지 돌봐주다가 네가 쪄 죽겄다."

할머니는 무더운 날에도 포대기 끈을 풀지 않는 나를 보시며 이렇게 안쓰러워하셨다.

강아지 뿐 아니라 병든 고양이나 날개를 다친 새, 아니면 함께 뛰어놀다가 무릎이 까진 친구들까지 모두 돌봤다.

어릴 적부터 자연스럽게 의사놀이를 한 셈이었다. 약을 바르거나 헝겊을 찢어 붕대를 감아주는 것이 고작이었다. 나의 유년 기억 속에 소꿉놀이나 인형놀이는 없다. 내가 의사 역할을 하고 친구들은 배가 아프거나 머리가 아픈 환자가 되는 식이었다.

할머니가 내게 하신 것처럼 아이들의 배를 어루만지며 "할미 손은 약 손, 우리 아가 배 아프지 않게 해주소"라고 하던가, 무당처럼 흰 보자기에 됫박 쌀을 싸서 머리가 아프다고 하는 동네 친구의 머리를 좌우로 문지르기도 했다.

당시 우리 집에는 많은 사람이 들락거렸다. 그 중에 걸인들도 꽤 있었다고 기억된다. 할머니는 허름한 옷차림의 걸인에게 개다리 소반에 밥과 반찬, 국까지 챙겨 마치 손님처럼 대접하곤 했다. 그런데 밥상을 꼭 언니와 나에게만 나르도록 하셨다. 심지어 등교하려는 나를 불러세워 심부름을 시키기도 하셨다. 나는 학교에 늦을까봐 발을 동동 구르면서 툴툴거렸다. 그럴 때마다 할머니는 "부모를 잘못 만나 거지가 됐지 똑같은 사람이다"고 말씀하셨다.

할머니는 추운 겨울 당신이 입고 있던 두루마기를 거리의 헐벗은 부랑아에게 벗어주고는 추위에 몸을 움츠리고 들어오시기도 했다.

마당에서 듣던 각설이 타령이 지금은 아득한 옛 일이 됐지만, 나의 뇌리에는 그 시절 그 광경이 생생하다. 이런 어린 시절의 경험과 교육이 내 안에 차곡차곡 쌓여 의사가 되겠다는 생각으로 굳어진 것 같다.

이길여 가천길재단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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