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원씨 "꽃은 네 번 졌어도 녹음방초 다시 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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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원 전 대통령 비서실장이 25일 서울 서초동 서울고법으로 출두하고 있다. 박 전 실장은 징역 3년과 추징금 1억원을 선고받고 법정구속돼 형이 확정되면 잔여 형기 2년을 복역해야 한다. 최승식 기자

3년여에 걸친 박지원 전 대통령 비서실장의 법정싸움이 사실상 마무리됐다. 박씨는 25일 오전 서울 서초동 서울고법 302호 법정에서 징역 3년 선고와 함께 법정구속되는 순간 상심하는 기색이었다. 하지만 재판부가 "확실한 증거가 없다"며 현대그룹에서 150억원을 받은 혐의(뇌물)에 대해 무죄로 판단하자 안도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박씨는 선고 직후 "육체적.정신적으로 힘들 때 가장 힘이 됐던 것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저의 무죄를 믿고 격려해 준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춘향이 이도령을 만나는 것으로 한이 다 풀린다'는 말처럼 누구에게도 섭섭함이나 원망은 없다"고 덧붙였다. 또 "꽃은 네 번 졌어도 녹음방초(綠陰芳草.우거진 나무 그늘과 싱그러운 풀이 돋는 시기)의 계절은 다시 왔다"며 지난 4년간의 심경을 털어놨다. 3년 전 구속수감되던 당시 그는 "꽃이 지기로서니 바람을 탓하랴"며 조지훈의 시 '낙화'를 읊었었다.

그는 2003년 6월 직권남용 등 혐의로 구속된 뒤 36차례나 법정에 섰다. 1심 10회, 항소심 10회, 대법원 1회, 파기환송심에서 15회다. 1, 2심 재판부는 뇌물죄를 인정해 징역 12년과 추징금 148억여원을 선고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2004년 11월 뇌물죄를 무죄 취지로 판단해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서울고법 형사2부는 이날 판결문에서 "피고인이 남북 정상회담의 성공적 개최라는 목표 달성에 집착해 불법 대북송금을 한 사실이 인정된다"며 "국민적 동의 과정을 전혀 거치지 않아 국론 분열과 사회 갈등을 초래했다"고 밝혔다. 박씨 변호를 맡은 소동기 변호사는 "5월 초 북측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의 방북을 협의하기 위해 박 전 실장을 초청했다"며 "그러나 박 전 실장은 '선고가 나기 전에 북한에 간다고 하면 논란이 불거질 수 있다'며 거절했다"고 전했다.

◆ "뇌물죄 인정할 확실한 증거 없다"=박씨는 2000년 4월 중순 서울 P호텔 내 주점에서 이익치 전 현대증권 회장에게서 1억원짜리 양도성예금증서(CD) 150장을 받은 혐의로 2003년 9월 기소됐다.

검찰에 따르면 고(故) 정몽헌 현대아산 회장이 대북사업을 원활하게 추진하기 위해 이익치씨에게 돈을 갖다 주라고 시켰으며, 박씨는 무기거래상 김영완(해외 도피)씨에게 150억원에 대한 관리를 맡겼다는 것이다.

이번에 서울고법이 뇌물 혐의를 무죄로 판단한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돈을 건넸다는 이익치 전 회장의 진술을 믿기 어렵다는 것이다. 박씨를 만난 시간, 김영완씨와의 친분 관계 등에 대해 진술이 오락가락했다. 둘째, 검찰이 낸 김영완씨 진술 조서를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김영완씨는 박지원씨가 현대에서 돈을 받지 않았을 경우 형사적 책임을 질 수 있는 상황에 처해진다"며 "따라서 '150억원을 받아 관리했다'는 김씨의 진술 조서를 믿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 미궁에 빠진 150억원 실체=이번 판결로 김영완씨가 어떻게 150억원을 갖게 됐는지가 의혹으로 남게 됐다. 김영완씨 측은 박씨가 준 돈이라며 40억원을 검찰에 제출했었다. 박씨와 김씨 측이 서로 "40억원이 내 돈이 아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나머지 110억원의 행방도 묘연한 상태다. 소 변호사는 "고 정몽헌 회장이 1995년부터 김영완씨와 가깝게 지냈다"며 "정 회장이 비자금 관리 차원에서 150억원을 김씨에게 맡겼을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 "대북송금, 국민적 합의 거쳐야"=법원은 '퍼주기 논란'을 일으켰던 대북송금에 대해 불법행위로 판단했다. 남북정상회담 개최를 위해서였더라도 박씨가 북한에 돈을 건네는 과정에서 직권을 남용하고 남북교류협력법을 위반했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북한에 1억 달러를 제공하기로 한 사실은 숨긴 채 국회 동의를 얻는 것이 부담스럽다는 판단하에 사기업에 1억 달러를 부담시키고 한국산업은행에 4000억원을 부당대출하게 하는 불법을 저질렀다"고 지적했다. 1심 재판부도 "법치주의 원칙을 쉽게 포기한 채 대북송금을 실행해 국민적 의혹이 불거졌고, 북한을 제도화의 틀로 이끌어 내지 못해 향후 대북 경제협력 사업에 상당한 부담을 남겼다"고 한 바 있다.

하재식.백일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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