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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이질 극복의 문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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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분단과 6·25전쟁 이후 40년의 세월 속에서 남과 북이라는 두 상이한 집단 간의 이념체계와 문화질서, 사고방식이 얼마만큼 큰 격차로 벌어졌을까. 20일자 본보의 「조선말사전, 철저한 김일성식 해석」이라는 기사를 읽으며 남북간 인식의 장벽을 새삼 통감하지 않을 수 없다.
사전이란 낱말의 모음인 동시에 그 말을 쓰는 집단의 장식과 가치관을 대변하는 집단문화의 표현양식이다. 북한의 사회과학원 언어학연구소가 펴낸 『현대조선말사전』은 남북 두 집단이 사용하는 언어가 동일 기호이면서도 그 기호가 지닌 개념, 인식이 얼마만큼 달라졌는가를 단적으로 예시해 주고 있다.
교회를 근로자들의 계급의식을 마비시키는 거점으로, 경관을 착취계급의 이익을 옹호하고 인민을 감시·탄압하는 관리로, 중을 종교의 탈을 쓰고 인민을 착취하는 기생 생활자로 조선말 사전은 풀이한다.
같은 기호, 같은 발음으로 표현되는 언어가 전혀 상반된 개념으로 해석되는 이 참담한 현실을 보며, 같은 민족, 같은 역사적 전통 속에서 같은 언어를 사용하며 살아온 수천년의 민족적 동질성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남과 북의 사회적 인식이 이만큼 달라져 있음을 우린 현실감있게 받아들여야 한다. 이제 남과 북이 대립적 관계에서 동반자적 관계로 길을 터 가는 마당에 서로의 실상을 보다 정확히 이해하고 인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전제다. 달라져있는 두 집단 간의 문화적 질서를 올바로 이해하고 극복하지 못하고서는 민족공동체로서의 동질성을 회복하기 위한 교섭과 교류는 더욱 멀고 험해질 수밖에 없다.
70년대초 남북공동성명이후 시작되었던 남북간의 협상과 교류가 짧은 기간에 실패로 끝났던 이유도 서로를 이해하려 들지 않고 서로를 이기려는 조급한 대결의 만남이었기 때문이다.
계급투쟁의 전사들로 구성되었을 북쪽의 대표단을 그들이 인식하는「자본주의적 퇴폐의 온상」인 호텔에서 반나 여인들의 춤을 관람케하고 서투를 수밖에 없는 서양요리를 대접하면서 곁눈질하며 포크와 나이프를 든 대표단의 당황스런 모습에 우리는 회심의 미소를 짓지 않았던가. 북을 찾은 남쪽 대표단엔 위용 넘친 소년군의 열병식을 참관시키고 수만명이 동원되는 카드섹션으로 기를 죽이지 않았던가.
그게 자유의 바람이고 그게 주체사상이라고 선전하던 시대는 지나갔다.
이솝우화의 여우와 두루미처럼 서로가 먹을 수 없게끔 음식을 대접하고 왜 먹지 않느냐고 골리는 식의 교류와 협상은 성공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조선말사전』에서 극명하게 드러나는 사회적 인식의 차이, 생활습관의 차이, 문화질서의 차이를 정확히 파악하면서 어떻게 마찰없이 서로를 극복하며 민족공동체로서의 새질서를 구성해 나갈 것인가에 모든 지혜가 모아져야 한다.
남북경제교류의 기미가 보이자 마자 창구에 밀려드는 기업들의 무분별한 북한물자 수입러시가 올바른 경제교류가 될 수 없듯이 로동신문과 북한서적의 개방화조처에 따라 쏟아져 나오는 북한의 원전복사물의범람 또한 북의 실상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조명하는데 있어 정당한가이드가 될 수 없다.
남북경제교류가 가시화되고 있는 오늘 북한원전의 출판이 금기와 규제의 대상일 수가 없듯, 북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가로막는 무분별하고 무책임한 출판행위 또한 정당화될 수는 없다. 구속 출판인의 석방과 아울러 양식과 책임감 있는 북한정보 도서의 출판을 당부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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