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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상학 교수님이 화장품 회사엔 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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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사진=김태성 기자]

23일 서울 논현동 인피니티 자동차 전시장. 이틀 후 열릴 태평양 남성 화장품 '오딧세이 스포츠'의 출시 기념 행사를 준비하기 위해 세련된 외모의 한 남자가 오전부터 분주하게 현장을 돌아다닌다. 담당 브랜드 매니저나 디자이너와 함께 전시 구도를 논의하고 무대장식 조명을 일일이 점검한다. 화장품 모델의 몸동작 하나하나를 챙길 정도다. 그는 태평양 직원이 아니라 대학 교수다. 우리나라엔 익숙하지 않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Creative Director)'일을 하는 중이다. 이 신제품 탄생의 기획 초기부터 출시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에 간여한 홍익대 의상학과 간호섭(36.사진 ) 교수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는 광고업계에선 보통 '총괄 책임자'를 일컫는다. 제조업 쪽에 와서 제품 개발의 전반을 총괄하는 사외 전문가라는 뜻으로 외연이 확대됐다. 간 교수는 지난해 9월부터 태평양 남성화장품팀에 합류해 상품 기획에서부터 제품 컨셉 결정, 디자인에 이르기까지 밀착 관여했다. 판촉물 제작 등 홍보.마케팅 전략도 그의 아이디어가 많이 반영됐다.

해외에서는 유명 디자이너가 기업체와 협업하는 일이 보편화돼 있다. 조르지오 아르마니가 벤츠 차량의 인테리어를 디자인한 것, 폴 스미스가 영국 해로드백화점의 푸드코트(식당가)를 설계한 것 등이 그 예다. 국내에서도 앙드레김이 삼성전자 제품의 디자인을 해 주기로 한 사례가 있다. 그러나 이번처럼 자기 전문 분야가 아닌 제품의 탄생 과정 일체를 외부 디자이너가 맡은 일은 흔치 않다. 장인 기질이 강한 디자이너와 채산성을 중시하는 상품개발진 사이에 의견이 맞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기업 입장에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두는 건 일종의 모험이라는 분위기도 있었다.

간 교수와 태평양 직원들 간에도 공동 작업에 난관이 없지 않았다. "남성적인 향을 더하되 캐주얼해야 한다. 너무 묽지 않으면서도 빡빡하면 안되다"는 그의 요구는 까다롭고 추상적이었다. 직원들은 "기술적으로 불가능하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경우가 많았다. 간 교수는 '예술적인 고집'을 많이 접고 동료들과 함께 해외출장을 다니며 의사소통의 기회를 자주 만들었다.그는 어떤 분야든 제조업이 살아남는 길은 '이종(異種) 결합' 뿐이라고 강조했다. 기능.품질 면에서는 차별화 하기 어렵게 된 만큼 독특한 디자인이나 분위기 같은 이미지로 부가가치를 만들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간 교수는 " 화장품 뿐 아니라 다른 분야에도 도전해 볼 생각"이라고 말했다.

글=김필규 기자 <phil9@joongang.co.kr>
사진=김태성 기자 <ts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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