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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 철학자 출신 김법린, 묻고 확인하는 리더십으로 이공계 인재 이끌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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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김법린 초대 원자력원장은 이미 3대 문교부 장관을 지낸 분으로 학문뿐 아니라 인격도 훌륭했다. 국내외에서 일제에 항거한 항일 독립투사 출신이기도 하다. 20대에 그런 분을 지척에서 모신 경험은 평생 내 삶에 영향을 끼쳤다. 행정대학원에서 미국인 교수들로부터 과학적인 서구 학문을 익혔다면, 수습행정원으로 파견된 원자력원에선 김 원장으로부터 성숙한 인간이 되는 법을 배웠다. 김 원장은 내가 물리학 전공자라고 하자 처음 만난 자리에서 원장 보좌역 비서를 맡겼다. 결재를 받으러 온 모든 서류를 읽게 해준 덕분에 많은 것을 보고 배울 수 있었다.

정근모, 과학기술이 밥이다 - 제131화(7556) #<8>인생 멘토가 된 원자력원장 #원장실 가득 물리학·원자력 원서 #공부하고 확인해가며 업무 진행 #어려운 보고 방으면 일일이 확인 #"방금 보고가 과학적으로 맞나" #겸손·소박의 리더십으로 존경 #성숙한 인간이 되는 법 배워

김법린 초대 원자력 원장(왼쪽에서 셋째)이 1927년 2월 벨기에 브뤼셀 에그몽 궁전에서 열린 세계피압박민족대회에 참가해 독립을 주장할 당시의 모습. 프랑스 파리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는 유학생 학생이었다.. 해방 뒤 3대 문교부 장관과 초대 원자력원장을 지냈다. 왼쪽부터 국내 대표 황우일, 유라시아 여행 중이던 민족변호사 허헌(1885~1953), 김법린(1899~1964), 일본 공산주의자 가타야마 센(片山潛, 1859~1933), 독일 유학생 대표 이인경(이미륵이란 필명으로 소설 ‘압록강은 흐른다’ 출간, 1899~1950), 국내 대표 이극노(1893~1978). 동아일보 27년 5월 14일자에 게재됐다[중앙포토]

김법린 초대 원자력 원장(왼쪽에서 셋째)이 1927년 2월 벨기에 브뤼셀 에그몽 궁전에서 열린 세계피압박민족대회에 참가해 독립을 주장할 당시의 모습. 프랑스 파리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는 유학생 학생이었다.. 해방 뒤 3대 문교부 장관과 초대 원자력원장을 지냈다. 왼쪽부터 국내 대표 황우일, 유라시아 여행 중이던 민족변호사 허헌(1885~1953), 김법린(1899~1964), 일본 공산주의자 가타야마 센(片山潛, 1859~1933), 독일 유학생 대표 이인경(이미륵이란 필명으로 소설 ‘압록강은 흐른다’ 출간, 1899~1950), 국내 대표 이극노(1893~1978). 동아일보 27년 5월 14일자에 게재됐다[중앙포토]

특히 복잡한 과학 지식이 요구되는 업무를 어떻게 챙기는지를 살필 수 있었다. 사실 김 원장은 국내에서 불교학을 배우고 프랑스 파리대에 유학한 철학자다. 원자력의 바탕인 물리학·화학·기계공학·수학 등과는 거리가 있다. 물리학이나 원자력 공학을 제대로 공부한 사람도, 이공계 지식과 리더십을 동시에 갖춘 인물도 드문 것이 1950년대 한국 실정이었다.

물리·화학 전공 안해도 독학으로 보충

이런 상황에서 자리를 맡게 된 김 원장은 부족한 부분을 의지와 노력, 그리고 리더십으로 메우려고 애썼다. 우선 독학으로 원자력에 대한 이해를 높이려고 힘썼다. 원장실은 수소문해서 구한 물리학·원자력 관련 각종 외국 서적으로 가득했다. 이를 읽으면서 필요한 지식을 섭렵했다. 이 덕분에 자연과학이나 공학 전공자에게 밀리지 않고 업무를 처리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다른 미덕도 보여줬다. 바로 확인 행정이다. 한 번은 부하 직원이 어려운 과학 용어와 개념을 앞세우며 원자력 관련 보고를 하고 나가자 배석했던 내게 물었다. "정 군, 방금 들은 이야기가 과학적으로 맞는가?"

독힙운동가 김법린. &#39;내 나이 열두 살 때(1910년 국치 당시), 조국을 빼앗겼다는 소식을 듣고 비분 통곡하는 어른들의 그 몸부림을 보았다. 그 분들의 서러워하던 모습이 내 일생의 가는 길을 지배하는 자극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내 평생 동안 조국독립의 염원이 유일의 신념처럼 몸에 배었을 것이다.-김법린의 회고&#34;[국가보훈처 보도자료]

독힙운동가 김법린. &#39;내 나이 열두 살 때(1910년 국치 당시), 조국을 빼앗겼다는 소식을 듣고 비분 통곡하는 어른들의 그 몸부림을 보았다. 그 분들의 서러워하던 모습이 내 일생의 가는 길을 지배하는 자극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내 평생 동안 조국독립의 염원이 유일의 신념처럼 몸에 배었을 것이다.-김법린의 회고&#34;[국가보훈처 보도자료]

수습행정원에 불과한 내게 물리학을 전공했다는 이유로 과학적 사실 확인 지시를 내린 셈이다. 나는 그 뒤로 그때그때 과학과 관련한 내용을 아는 대로 원장에게 설명한 것은 물론 미처 정확하게 모르는 부분은 따로 공부하거나 조사해서 알려드렸다. 이처럼 일일이 묻고 확인하는 김 원장에게 부하들은 보고를 대충 하거나 과장해서 올릴 수가 없었다. 부하들을 불신해 윽박지르지도, 반대로 보고를 맹신하지도 않으면서 오로지 사실 확인과 정확한 행정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었다.

확인 행정…부하 일 잘하게 리더십 발휘 

리더십도 뛰어났다. 항상 부하들을 격려하고 제대로 일할 수 있도록 도왔다. 독립운동가 출신의 철학자인 김 원장은 지도자가 무엇인지를 몸소 보여줬다. 이처럼 지척에서 김 원장의 언행을 지켜보며 의사결정 방식이나 사람을 배려하는 방법을 비롯해 지도자로서 갖춰야 할 소양 등을 다양하게 보고 익힐 수 있었다. 항상 상대방을 배려하는 자세를 갖게 해준 점이 가장 중요한 가르침이라고 생각한다. 늘 인내하며 겸손하게 행동하고, 검소하며 소박한 생활을 하는 모습도 보고 배웠다. 학교와 책에서는 배울 수 없는 가르침이었다. 이런 멘토를 만난 것은 내 일생의 행운이었다. 어느 날 김 원장이 갑자기 나를 사무실로 불렀다.

채인택 국제전문기자, 황수연 기자 ciimccp@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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