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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에게 왜 애 있는 집에 시집왔나 물어보니…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송미옥의 살다보면(52)

가을이 되니 부모님 생각이 많이 난다. 지금 내 나이에 돌아가신 새엄마가 더 생각난다. 친엄마는 내가 다섯 살, 동생이 세 살 때 돌아가셨으니 얼굴이나 추억은 꿈속같이 아련하여 기억이 없다.

두 돌 지난 동생(왼쪽)이 발발 기어가 ‘엄마~’ 하고 안기는 바람에 그냥 눌러앉아 살았다는 우리 엄마. 친엄마 이상으로 우리 자매를 마음을 다해 키우셨다. [사진 송미옥]

두 돌 지난 동생(왼쪽)이 발발 기어가 ‘엄마~’ 하고 안기는 바람에 그냥 눌러앉아 살았다는 우리 엄마. 친엄마 이상으로 우리 자매를 마음을 다해 키우셨다. [사진 송미옥]

엄마가 돌아가시고 장사를 지내는 날 성당에서 동네 분들이 모두 모여 미사를 드릴 때 나는 사람이 많이 모인 곳에서 폴짝폴짝 뛰며 고무줄놀이를 했던 기억이 난다. 여러 사람이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니 나는 더욱더 높이 뛰어서 자랑하려고 폴짝폴짝 뛰었다. 지금도 생각하면 눈물 나는 풍경이다.

외할머니가 새엄마를 데리고 오셨다. 그 당시에 외할머니는 당신 딸이 남기고 간 어린것들을 위해 강원도 산골에 사는 가난한 집안의 마음 착한 여자를 소개받아 부랴부랴 데리고 온 것 같다.

나이가 들어 우리 자매는 엄마랑 누워 이런저런 옛날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는데 엄마는 어쩌다가 애 있는 집에 시집와서 고생하며 살았냐고 물으니 엄마가 말했다.

“느네 외할머니가 힘들게 사는 나에게 사연을 이야기하며 ‘내 딸 하자~’ 하길래 입에 풀칠하기도 힘든 산골생활이 싫어서 도시에 가서 살 거라고 따라나섰잖아. 와보니 너는 그래도 철이 들어서 꾸벅 인사만 하는데 저것이(동생을 가리키며) 나한테 살금살금 걸어오더니 엉덩이를 쓱 빼서 내 무릎에 앉더니만 ‘엄마~’ 하며 가슴에 폭 안기는 거야. 그래서 그냥 살았지 뭐. 흐흐.”

예민하던 중학교 시절 하루는 엄마가 빨래를 하다말고 후닥닥 방으로 들어가셨다. 무슨 일인가 궁금해서 따라 들어가 보니 사진을 다리미로 다리고 계셨다. 힐끗 보니 젊은 여자의 사진이었는데 누구냐고 물으니 ‘형님’이라고 하셨다.

아버지의 바지 속에 든 지갑을 안 꺼내고 실수로 같이 물에 넣는 바람에 그 사달이 난 것이다. 엄마는 지갑을 말려서 다린 사진을 제자리에 고이 끼워 놓았다. 엄마가 나간 후 궁금해서 몰래 꺼내어 보니 돌아가신 엄마의 사진이었다.

지금은 앳된 나이 29살에 동생을 낳다가 돌아가신, 얼굴도 기억 안 나는 엄마. 새엄마의 사랑으로 아버지 지갑 한쪽에서 오래 간직하게 된 엄마 사진이다. 지금은 내가 간직하고 있다. [사진 송미옥]

지금은 앳된 나이 29살에 동생을 낳다가 돌아가신, 얼굴도 기억 안 나는 엄마. 새엄마의 사랑으로 아버지 지갑 한쪽에서 오래 간직하게 된 엄마 사진이다. 지금은 내가 간직하고 있다. [사진 송미옥]

아버지에겐 가슴에 뭍은 애틋한 여자였지만 새엄마에겐 다른 의미의 사진이었을 텐데 사춘기 시절이었던 그때 새엄마가 우리 엄마를 소중하게 생각해 주는 것이 고마워서 어지간한 일에도 말썽을 안 부리고 착한 아이가 되기로 맹세했다.

그러나 맹세는 맹세일 뿐 그 시절엔 여러 가지 이유로 사춘기 텃세를 부릴 이유가 너무 많아서 이런저런 일로 애를 많이 태웠다. 학교에 안 가고 영화관에 갔다든가, 책값을 떼먹고 친구들이랑 여행을 갔다든가, 소소한 거지만 보란 듯이 말썽을 피워도 아버지는 묵묵히 지켜봐 주셨고 엄마도 혼도 못 내고 말도 못하고 혼자서 속을 태우고 계셨다.

그리고 사춘기 때는 마음 먹은 대로 거짓말도 진실같이 만들 수 있는 재주가 있었다. 얼굴도 기억 안 나는 엄마가 마치 엄청 정을 주다가 방금 돌아가신 듯 슬픈 스토리가 되어서 가끔은 혼자 산소에 가서 엉엉 울다가 오곤 했다. 산소는 대구에서 버스로 갈 수 있는 칠곡이었는데 무서움도 없이 산꼭대기에 있는 그곳을 찾아가곤 했다.

어느 날 또 마음이 허전해 칠곡행 버스를 타고 산소를 느직느직 올라가다 보니 엄마 산소에 다른 사람이 먼저 와서 풀을 뽑으며 계셨다. 가까이 가니, 아…. 엄마가 와서 먼저 울고 계신 것이다. 이전에도 산소를 가면 누군가가 왔다 간 흔적이 있어서 아버지려니 생각했지 엄마가 다녀가는 건 생각도 못 한 일이라 너무 놀라서 말문이 닫혔다.

“형님, 도와주이소”라며 대화했을까? 나보다 엄마가 더 힘드셨을 거라는 건 나이 들어서야 깨달았지 그 당시엔 몰랐다. 그러나 갑자기 말썽을 피우고 속상하게 한 모든 일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날 엄마랑 함께 집으로 돌아오면서 서로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다시 마음을 잡아 착한 청소년의 길로 걸어갔다.

지나고 보니 한 시절 비행 청소년이 되어 보려고 아무리 헛짓을 해도 부모님의 보이지 않는 사랑과 지켜봐 주는 마음을 느끼고 깨달으면 등을 떠밀어도 안 되었다. 낳은 정 기른 정 다 소중하지만 아이들에겐 좋은 부모가 되어 뒤에서 늘 지켜봐 준다는 걸 깨닫게 해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송미옥 작은도서관 관리실장 sesu32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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