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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껏 울 수 있는 아지트, 그 외딴 산골 실개천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송미옥의 살다보면(51)

낙동강변 정화사업으로 농사를 짓던 강섶 땅을 코스모스길로 만들어놓았다. 자전거길이 중간에 있어서 가을이면 화가가 많이 와 가을을 담아간다. [사진 송미옥]

낙동강변 정화사업으로 농사를 짓던 강섶 땅을 코스모스길로 만들어놓았다. 자전거길이 중간에 있어서 가을이면 화가가 많이 와 가을을 담아간다. [사진 송미옥]

가을이다. 현관문만 나서면 황홀하다. 마당에 있는 온갖 색색의 국화도 가을을 알리려고 봉우리가 곧 터질 듯하고 문밖이 도로인 집이 삭막해 봄에 온갖 꽃씨를 뿌려놨더니 온갖 꽃과 한들거리는 코스모스가 피어 마음을 따뜻하게 해준다. 운전하는 차 안에서도 창밖에 보이는 풍경과 높은 하늘이 가을을 말해주고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은 감성 도우미가 되어 이유 없이 울컥해지는 계절이다.

며칠 전에는 동호회에 어느 분이 올린 글을 읽으며 감동해 울컥해있는데 음악까지 감성을 자극했다. 나이가 들고 보니 가을은 울고 싶은 계절이다. 어느 시인의 글귀처럼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찬란한 슬픔의 가을 같다.

때론 눈물이 스트레스를 푸는 데 일등 공신이다. 그냥 꾹꾹 눌러 참아 눈물을 감추기보다는 엉엉 소리 내어 울고 나면 뱃속이 확 빈 것 같아 기분이 좋아진다. 내성적인 성격이라 아직 누구 앞에서 소리 내어 울어 본 적이 거의 없다. 숨어서 운다.

길갓집이라 봄날 울타리 아래 여러 가지 꽃씨를 뿌렸더니 가을이 되자 꽃잎을 활짝 열고 인사하는 예쁜 꽃들. [사진 송미옥]

길갓집이라 봄날 울타리 아래 여러 가지 꽃씨를 뿌렸더니 가을이 되자 꽃잎을 활짝 열고 인사하는 예쁜 꽃들. [사진 송미옥]

한참 갱년기가 절정에 올라 주위의 모든 것이 다 짜증이 나고 이유 없이 눈물이 나고 보이는 것마다 트집 잡을 때가 있었다. 이것은 겪어봐야 알지 무어라고 설명도 할 수가 없다. 밥을 먹다가도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지를 않나. 시도 때도 없이 식은땀이 줄줄 나다가 오한이 들다가를 반복하는데 그것이 밤이면 더 심해져 괜히 옆 사람들이 그 짜증을 다 받아줘야 할 때가 있었다. 내 경우엔 지금까지도 약하게 진행 중이다.

지금도 생각나는 어느 날의 풍경이 우습다. 남편은 내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잔소리가 시작되면 짜증으로 대치하려는 아이들에게 큰소리로 외쳤다. “공습경보닷! 모두 입 다물고 수구리!” 지금 생각하면 남편의 너그러운 이해와 사랑으로 갱년기를 잘 넘기고 지나간 것 같다.

유행가 가사처럼 ‘내가 나를 어쩌지 못해 울고 싶어질 때 마음껏 울기라도 하자’라고 생각하고 언젠가는 울 자리를 물색하러 다닐 때도 있었다. 우선 혼자서 운전하는 차 안이 가장 좋은 자리였고 다음은 성당이었다. 미사가 없는 날 성당에 들어서면 저절로 눈물이 나왔다. 기도하며 실컷 울고 나면 마치 그날의 모든 죄를 용서받은 것 같은 착각도 들었다.

시골집 근처에 있던 숨어 울기 좋은 나의 아지트랑 많이 닮은 곳이 집 근처에 있다. 그런데 이젠 울 일이 없어서 풍경만 보고 지나다닌다. [사진 송미옥]

시골집 근처에 있던 숨어 울기 좋은 나의 아지트랑 많이 닮은 곳이 집 근처에 있다. 그런데 이젠 울 일이 없어서 풍경만 보고 지나다닌다. [사진 송미옥]

그리고 시골 살 적엔 집에서 3km 정도 떨어진 곳에 울만 한 장소를 찾아뒀다. 산 밑을 흐르는 실개천이 있는데 외딴곳인 데다가 앞에 큰 바위가 있어 비가 많이 오는 날 폭포가 되어 흐르는 그 아래엔 수영할 만큼 깊은 소(沼)가 있는 장소였다.

동네 사람들이 바위에 얽힌 스토리도 말해주었다. 옛날 어느 한 마을에서 처녀, 총각이 사랑에 빠졌는데 부모님이 정해준 배필을 만나 시집을 가게 돼 헤어져야 했단다. 새색시가 시집가는 날 가마 안에서 울며 흐느끼다 보니 가마꾼들이 도랑을 건너는데 가마가 출렁거려 너무 위험한지라 울지 말라고 말했단다.

창을 열어보니 깊은 소를 지나는 외나무다리 길인지라 새색시는 인당수에 빠진 심청이처럼 퐁당 물속으로 뛰어들었단다. 그렇게 죽어서 사랑을 지켰다는 곳이다. 그 소식을 들은 남자가 오랫동안 이곳에 나타나 사자 울음을 울었다. 이곳의 개울은 마르질 않고 비가 오는 날이면 큰 바위를 스치는 바람 소리가 빗소리와 합쳐져 웅웅 거리는 소리를 낸다. 가끔 와서 멍하니 있기만 해도 마음이 정화되고 울고 싶을 때 이곳으로 오면 마치 비밀 아지트를 만들어 놓은 것 같이 기분이 묘하고 좋았다.

어느덧 시간에 끌려와 다시 맞이하는 이 가을, 살아있는 모든 이에게 좋은 일은 좋은 데로 나쁜 일은 나쁜 데로 잘 흘러가 눈물에 씻지 않아도 되는 찬란한 가을이 되어주기를 기도해본다.

송미옥 작은도서관 관리실장 sesu32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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