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네디 백악관의 음악회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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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4호 27면

an die Musik: 파블로 카잘스의 백악관 콘서트 

케네디 대통령 시절인 1961년 파블로 카잘스의 백악관 콘서트 실황을 녹음한 음반

케네디 대통령 시절인 1961년 파블로 카잘스의 백악관 콘서트 실황을 녹음한 음반

불현듯 생각이 나서 음반 한 장을 빼들었다. 파블로 카잘스의 ‘백악관 콘서트’(A Concert At The White House)다. 1961년 11월 13일 카잘스는 케네디 대통령의 초청으로 백악관 이스트 룸에서 연주회를 열었다. 절친인 바이올리니스트 알렉산더 슈나이더와 피아니스트 미에찌슬라브 호르초프스키가 함께 했다. 음반 표지에는 연주회 전경이 큼직한 흑백사진으로 실려 있다. 카잘스가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앞줄 가운데 앉은 케네디와 재클린 부부, 푸에르토리코 지사 루이스 무뇨스 마린 부부가 박수를 친다.

당시 카잘스는 미국 자치령 푸에르토리코에 살고 있었다. 스페인의 프랑코 독재정권에 저항해 망명자로 떠돌던 그가 생애 마지막 삶터로 선택한 곳이었다. 조국 카탈루냐에서 멀지 않은 피레네 산중의 프라드에 살던 그가 머나먼 카리브 해의 푸에르토리코로 이주한 것은 마르티타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머니의 고향 푸에르토리코에서 온 소녀 마르티타는 노인 카잘스를 걷잡을 수 없는 열정에 빠트려 두 사람은 1957년 결혼하기에 이르렀다. 무려 60살 연하에 수군거리는 사람이 없지 않았지만 카잘스는 괘념치 않았다. 아내이자 비서, 간호사였던 마르티타가 백악관 연주회에 동행했음은 물론이다. 그해 카잘스는 85세였다.(『나의 기쁨과 슬픔 파블로 카잘스』, 앨버트 E. 칸)

카잘스에게 백악관 연주회는 처음이 아니었다. 57년 전인 1904년 테오도르 루스벨트 대통령의 초청으로 백악관에서 연주한 적이 있다. 그는 20세기 초에 이미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카잘스는 두 번째 백악관 연주회에서 한 백발 여성과 인사를 나누었는데, 그녀는 처녀시절 첫 번째 연주회에 참석했던 루스벨트 대통령의 딸이었다.

카잘스는 케네디를 존경했다. 위기에 직면한 세계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지도자라고 생각했다. 그가 대통령이 되자 편지를 보내 “인도주의를 위한 상서로운 징조로 승리를 기뻐하노라”고 축하했다. 이런 인연이 백악관 연주회 초청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카잘스는 초청연주 수락을 주저했다. 프랑코 정권을 승인한 나라에서는 공개 연주를 하지 않는 것이 그의 원칙이었기 때문이다. 고심한 끝에 백악관 방문이 조국의 민주화에 한 몫을 할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카잘스는 케네디와 한 번 더 의미 있는 인연을 이어갈 기회가 있었다. 1963년 가을, 케네디는 그에게 대통령 자유메달을 주고 싶다는 전보를 보냈다. 자유메달은 미국 대통령이 민간인에게 수여하는 최고훈장이다. 카잘스는 워싱턴행을 준비했다. 그런데 행사 며칠 전, 마르티타는 오후 내내 입을 다물었다. 카잘스는 밤이 되어서야 케네디 암살 소식을 듣고 오래도록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백악관 콘서트 음반에는 멘델스존과 쿠프랭, 슈만의 실내악이 담겨 있다. 실황인데다 카잘스가 고령이라 연주의 질이 빼어나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흑백사진을 바라보며 첼로 소리를 듣다보면 강인한 신념으로 평생을 관통한 시대의 양심이 느껴진다. 마지막 곡 ‘새들의 노래’에서는 카잘스의 흐느낌과 탄식이 거푸 터져 나온다. 고향 카탈루냐의 선율은 지독한 향수를 자극했을 것이다. 카잘스는 97세까지 살았으나 고향에 가지 못했다. 프랑코는 그보다 수명이 조금 더 길었다.
이 음반이 불현듯 생각난 것은 2018년의 백악관 주인 때문이다. 행동거지가 ‘매우 매우’(very very) 유치해 참모로부터 ‘초등학교 5학년 수준’이라고 조롱당하는 그에게 예술적 소양을 기대하는 것은 애당초 무리다. 한반도의 운명이 딱하게도 그의 장기판 위에 올라가 있는데, 부디 졸(卒) 취급을 당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글 최정동 기자 choi.jeongd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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