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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복 연애소설> 난 남의 글만 보면 고치고 싶어져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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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이정권 기자]

[일러스트 이정권 기자]

제2화 

오늘은 수요일, 그녀가 도서관에 오지 않는 날이다. 마침 잘 됐다 싶었다. 어제 그녀의 첫 메일을 받고 어지러웠던 마음을 다독이고 싶었다. 아니, 오늘 하루쯤은 그녀를 생각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사실 지난 한 달간 그녀로 인해 얼마나 많은 달뜬 시간을 보냈던가. 혼자 온갖 상상을 하며 호기심의 창을 맘껏 열었는데 그녀의 첫 반응은 이만저만 낙담이 아니었다. 이 정도에서 열기를 식히고 차분해지라는 뜻 같았다. 도서관에 나온 것도 두 달 전 갑자기 백수가 된 뒤 이것저것 생각하며 다음 행로를 고민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그녀를 본 뒤 그 목표도 실종된 상태였다.

온라인으로 예약한 자리에 앉기 전 주위를 둘러봤다. 도서관을 드나들면서 버릇이 하나 생겼다. 전후좌우 4인의 나이를 추측하고 평균을 내 보는 것이다. 오늘은 50대 중반쯤으로 양호하다. 어떤 날은 70이 넘을 때도 있다. 오늘도 자리에 앉자마자 나만의 방법으로 명상을 시작했다. 눈을 감고 책상에 두 팔을 괴고 합장한 두 손의 엄지를 턱밑에 대고 손가락 끝은 이마에 댔다. 이렇게 하면 생각이 집중되고 마음은 차분해진다.

그런데 오늘은 영 먹히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이런 경험, 주위서 꽤 들어봤다. 어떤 문제에서 도망가려고 하면 그 문제가 더욱 끈질기게 들러붙는 일 말이다. 코끼리는 생각하지 말라고 하면 어느새 코끼리가 머릿속을 꽉 채우게 된다는 얘기도 책에서 읽은 적이 있다. 그런 때는 집중할 다른 일을 찾아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말하지만 그건 역시 교과서 같은 처방이었다. 결국 어떤 생각을 의식적으로 피한다는 건 몹시 어려운 일이라는 걸 확인한 하루였다.

목요일은 그녀를 볼 수 있는 날이었지만 나는 두 달 전 그만둔 회사를 들러야 했다. 지난해 시간 외 수당이 더 많이 지급됐다며 인사팀에서 연락이 왔기 때문이다.

-그게 몇 푼이나 된다고 퇴사한 사람을 이렇게 귀찮게 만들어….

절로 불평이 나왔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도 신입에게, 업무처리는 내가 아니라 회사 규정집이 시키는 대로 하는 거라고 늘 얘기해 왔으니까. 문제는 그녀와 같은 모양, 같은 밀도의 공기를 나누는 도서관을 하루 결근해야 한다는 거였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니 이것 역시 나쁘지 않았다. 그녀에게 불편한 마음을 그런 식으로라도 전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순전히 내 생각일 뿐이리라. 그녀는 내가 도서관에 오든 말든 전혀 관심이 없을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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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실, 싫다는 여자를 끈질기게 쫓아다니는 스타일이 전혀 아니다. 그게 자존심이든 성격 탓이든,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힘의 법칙을 믿지 않는 쪽이다. 주위에 그런 식의 연애에 성공한 이가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하여튼 그 덕에 지금까지 결혼을 못 했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어렸을 적 숱하게 읽고 들었던 '선녀와 나무꾼' 이야기는 시작부터 잘못된 만남이라고 생각한다. 결혼하기 위해 선녀의 날개옷을 감추는 것, 아니 훔치는 일은 명백히 틀린 일이다. 하늘나라로 돌아갈 수 없게 된 선녀 입장에선 얼마나 기막힌 일인가. 그런 선녀를 집으로 데려와 강제로 아내로 삼았으니 말도 안 되는 불법을 저지른 것이다.

지난 한 달간 나에게 그녀는 선녀 같은 존재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을 사지 않고 어떤 강요도 의미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대체로 인상 좋다는 소리를 듣는다. 소개팅에서도 퇴짜를 맞은 적인 별로 없다. 그동안 꽤 진지한 연애도 몇 번 해봤다. 하지만 홀어머니에 외아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묘한 균열이 생기는 걸 경험하곤 했다. 진짜 마음에 들었던 여자라도 나의 가족관계를 판에 박힌 것으로 해석하는 순간 상대를 설득할 생각은커녕 내 마음이 먼저 저 멀리 달아나 버렸다. 그런데 이번은 좀 다른 것 같다. 그녀가 나에게 관심 없다는 의사를 몇 번 보였지만 나는 계속 그 주위를 맴돌고 있다.

"저는 아직 그쪽 이름도 모르지만 무척 호기심이 많습니다. 평소 관심사는 무엇이고, 도서관에는 왜 오고, 주말은 어떻게 보내는지 등등요. 이 편지가 지금 하는 일을 방해할지 모른다고 걱정하면서도 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 글의 부족한 부분을 고쳐주시면 더 없이 감사하겠습니다."

나는 그녀가 지도편달이라는 말이 가장 마음에 든다고 했기에 그 점을 공략하기로 했다. 금요일 오전 10시쯤 세 번째 메일을 보내고 난 뒤 난 넓은 열람실을 한 바퀴 둘러봤지만 그녀를 발견할 수 없었다. 물론 그날은 그녀가 도서관에 오지 않는 날이다. 답장은 오후 4시쯤 왔다. 사적인 질문은 사양하며, 글쓰기에 관한 의견만 환영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내가 보낸 첫 편지를 이렇게 고쳐 보내왔다.

"김천이라고 합니다. 일전에 화장실 앞에서 파우치 건으로 처음 마주쳤습니다. 그 며칠 뒤 자판기 커피를 뽑으면서 잠깐 말을 걸기도 했죠. 그때 이름을 말씀드렸는데 아마 기억 못 하실 겁니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 김천이라고 소개하면 다들 이름이 아니라 고향부터 말씀하시네요' 하면서 재미있게 반응한다 했지요.

그쪽에선 전혀 모르겠지만 저는 7월 16일 이 도서관에서 처음 무명씨를 봤습니다. 화장실에 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환하게 빛나고 있는 건너편 자리를 발견했습니다. 비록 뒷모습이었지만 자태도 우아했습니다. 제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향했고 얼굴도 볼 수 있었습니다. 그 순간의 설렘은 앞으로도 오래 지속될 것 같습니다. 주위까지 은은하게 밝히는 존재감에 잠깐이었지만 넋을 잃었습니다. '군계일학이란 이런 때 쓰는 말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음날부터 저는 하루도 빠짐없이 도서관을 드나들고 있습니다. (그 전에는 어땠는지 궁금합니다. 그래서 예컨대 '전에는 며칠에 한 번 심심하면 오는 정도였습니다'와 같은 문장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이 8월 14일이니 거의 한 달이 됐군요. 그동안 무명씨가 이곳 디지털도서관에 온 날은 어제까지 정확히 열흘이었습니다. 그날 이후 저의 도서관 출입 목적은 무명씨 찾기가 됐습니다.

이렇게 고쳐보았습니다. 본인의 글과 비교해 보시고, 의견 있으면 듣기를 원합니다.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 황동규 선생의 작품 중에 이런 시가 있습니다. 나는 남의 글만 보면 고치고 싶어집니다. 잘못 쓴 글을 보면 참을 수 없기 때문이죠. 물론 내 글에도 흠은 많습니다. 누구의 글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유명한 작가의 글도 완벽하지 않습니다. 저는 글을 좀 더 좋게 다듬을 때 희열을 느낍니다. 참 별난 성격이죠?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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