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왕 조문 사절 각국서 골머리|가기도 그렇고 안가기도 그렇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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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고「히로히토」(유인)일왕의 장례식은 몇몇 국가들로 하여금 전쟁의 악몽과 현 일본국력의 실체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하는 골치 아픈 상황으로 몰아넣고 있다.
오는 2월24일 약8천만 달러가 소요될 장례식엔 세계1백30여 국가들로부터 고위인사 및 왕족들이 참석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지만 일본의 많은 과거 적국들은 조문사절로 누구를 파견할지 결정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는 특히 2차 대전중 일본군의 포로에 대한 잔학 행위나 영토의 강점을 겪어 일본제국주의에 의한 상처가 강하게 남아있는 국가들에서 논란이 되고 있다.
이 문제는 한국·중국 등 아시아국가는 물론 네덜란드·영국·뉴질랜드·호주 등지에서 광범한 국민여론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러나 2차대전중 유럽국가들의 식민지였던 다른 아시아국가들에서는 「히로히토」에 대한 평가도 관대하여 조문사절로 대부분 왕족이나 국가원수가 참석할 것이라는 신호를 보이고있다.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주된 무역상대국이면서 원조국인 일본을 자극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으로 보인다.
미군점령에서 비롯된 일본현행헌법은 일왕을 국가의 원수가 아닌 상징으로 규정하고 있다. 일본관리들은 이번 장례식에 얼마만한 수준의 외국 조문사절을 기대하고 있는지를 공개적으로 밝히지 않고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국가원수나 왕족의 참석을 분명히 희망하고 있다.
「히로히토」를 전범으로 처형하는 대신 일본통합의 상징물로 이용했던 미국은 「부시」차기 대통령의 참석이 예상된다. 일본제국주의의 군사훈련을 받았던 「수하르토」인도네시아대통령은 장례식 참석을 즉각 발표했다.
미국의 식민지에서 태평양전쟁을 통해 일본에 점령당했던 필리핀의「아키노」대통령도「히로히토」의 죽음에 「깊은 조의」를 표하고 직접 참석을 발표했다.
그러나 한국은 노태우 대통령이 장례식 참석을 고려하고 있다는 보도가 나오자 반대여론이 용암처럼 분출했으며 주요일간지들도「히로히토」를 「일본왕」이라고 낮춰 부르면서 일제의 침략전쟁에 책임을 져야할 「전범」으로 비난하고 있다.
일본의 침략과 점령으로 2천만명의 희생자를 낸 중국은 아직까지 일왕장례식에 누구를 참석시킬지 발표하지 않고 있다.
중국지도층 대부분이 중일전쟁에 참전한 경험이 있는 사실에 비추어 볼때 중국의 태도에 관심이 쏠리고있는 것은 당연하다.
호주는 곧 총독에 취임할「빌·헤이든」을 조문사절로 파견키로 결정했으나 태평양 전쟁당시 호주포로들에 대한 일본의 가혹한 처사에 치를 떨고 있는 참전용사와 일반국민들의 분노에 찬 격렬한 항의가 빗발치고 있다.
호주의 노조지도자「존·해퍼니」씨는 『「히로히토」의 장례식에 대표로 참석하는 것은 「히틀러」의 장례식에 참석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주장한다.
「엘리자베스」여왕의 부군인「필립」공을 보내기로 한 영국에도 비슷한 논란이 일고있다. 「필립」공은 외교관례상 여왕에 이어 두번째 지위를 갖고 있는데 여왕은 국장행사에 전혀 참석치 않는다.
「히로히토」가 사망한지 6일이 지난 현재까지 국왕참석을 통고한 국가는 통가·부탄과 같은 소국을 포함한 14개국에 지나지 않는다.
동경에 있는 서방외교관들은 많은 국가들이「조문외교」의 대표결정에 앞서 다른 나라, 특히 소련의 눈치를 보고 있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고르바초프」소련공산당서기장이 예기치 않게 참석, 이완된 그의 대아시아정책을 부추길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직도 냉랭한 일소관계에 비추어 보면 그같은 일이 가능할 것 같지 않지만 만약 소련이 그와 같은 제스처를 취할 경우 일본은 대단한 환영을 할 것이므로 다른 나라도 이러한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 없는 입장이다. 【AFP·연합=본사특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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