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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사·정 엇박자에 60년 공장 폐쇄 … 호주 차 산업 끝났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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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다시 뛰자, 자동차 산업 <하>

문닫은 호주 애들레이드 GM홀덴 공장의 을씨년스러운 모습. [윤정민 기자]

문닫은 호주 애들레이드 GM홀덴 공장의 을씨년스러운 모습. [윤정민 기자]

호주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주 애들레이드에서 북쪽으로 약 20㎞ 떨어진 한 공장. ‘홀덴(HOLDEN)’이라고 적힌 간판도, 건물과 시설도 모두 멀쩡했지만 기계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사무실 건물과 정문 주변에도 1시간 넘게 드나드는 차나 사람이 전무했다. 정문을 지키는 출입 관리자만이 한차례 바깥을 내다볼 뿐이었다. 공장에 관해 묻자 그는 “이미 문 닫은 공장이라 말할 게 없다”고 했다.

‘호주 자존심’ 홀덴 문 닫은 이유 #정부, 중재 역할 못하고 지원 끊어 #노조, 회사 어려운데 고임금 유지 #GM은 지원 끊기자 미련없이 철수 #“한국도 노사 힘겨루기 자제해야”

버려진 땅이 된 이곳은 지난해 10월까지 완성차를 생산했던 GM홀덴 엘리자베스 공장이다. 1856년 마구 제작사로 출발한 홀덴은 1948년 호주 최초의 완성차 회사가 됐고, 이 공장은 1958년 가동을 시작했다. 1931년 GM에 인수됐지만, 이후에도 호주 자동차 산업의 자존심이자 경제 번영의 상징으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1년 전, 공장은 문을 닫았고 호주 자동차 산업의 역사도 함께 끝을 맞이했다. 홀덴 공장이 문을 닫기 며칠 전엔 도요타가, 1년 전엔 포드가 호주에서 공장을 철수했다. 홀덴 공장 인근에 사는 톰 콘래드(70)씨는 “홀덴 납품업체에 다니던 아들을 포함해 수많은 사람이 실직했고, 지역도 생기를 잃었다”고 말했다.

호주산 자동차의 명맥이 끊어진 이유는 높은 임금과 생산비용이다. 호주의 최저시급은 18.93호주달러(한화 1만5257원)로, 한국의 두배가 넘는다. 영국 정부가 발행한 보고서에 따르면 근로자 1명을 고용했을 때 드는 시간당 비용인 ‘피용자보수비’도 47.7달러로 세계 최고다. 자동차 산업이 경쟁력을 갖추기 힘든 수준이다.

문닫은 호주 애들레이드 GM홀덴 공장은 지난해 10월 20일 ‘홀덴 VF 코모도어’를 마지막으로 생산한 뒤 문을 닫았다. 앞서 포드와 도요타의 호주 공장이 문을 닫은 데 이어 GM홀덴 공장마저 폐쇄되면서 호주엔 완성차 생산 시설이 한 곳도 남지 않게됐다. [EPA=연합뉴스]

문닫은 호주 애들레이드 GM홀덴 공장은 지난해 10월 20일 ‘홀덴 VF 코모도어’를 마지막으로 생산한 뒤 문을 닫았다. 앞서 포드와 도요타의 호주 공장이 문을 닫은 데 이어 GM홀덴 공장마저 폐쇄되면서 호주엔 완성차 생산 시설이 한 곳도 남지 않게됐다. [EPA=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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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현지에서 만난 전문가들은 “정부와 노조, 기업이 빚어낸 불협화음이 근본적인 이유”라고 입을 모았다. 고비용 구조를 극복하고 산업을 살릴 기회가 있었지만, 이들이 제 역할을 못 해 기회를 잃었다는 것이다. GM홀덴 공장 폐쇄 전 실사에 참여한 고란 루스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대 교수는 “임금은 하나의 요소일 뿐 핵심은 아니다”며 “산업을 키우기 위한 전략이나 기술·디자인 혁신이 없었고, 결정적으로 정부와 기업, 노조 등 주요 플레이어들이 제 역할을 못 한 게 진짜 이유”라고 진단했다.

실제 호주 정부는 자동차 산업을 두고 오락가락하는 모습을 보였다. 노동당 집권 시기 정부는 “앞으로도 호주에서 계속 자동차가 생산될 것”이라며 지속적인 지원 의지를 밝혔다. 그러나 정권이 바뀌자 셈법도 달라졌다. 보수 정권은 자동차 공장에 돈을 계속 투자하는 걸 원치 않았다. 샐리 웰러 호주가톨릭대 교수는 “자동차 산업은 국가의 전략적 지원 없이는 세계 어떤 나라에서도 제대로 성장하기 힘든 산업”이라며 “호주의 보수 정부는 제조업의 중요성을 낮게 평가했고, 그 돈을 다른 첨단 산업에 투자하는 것을 선호했다”고 말했다.

이들은 또한 지원을 끊기 전에도 정부가 제 역할을 못 했다고 지적했다. 돈만 줬을 뿐 산업 규모와 경쟁력을 키우기 위한 전략과 구조조정 노력 등이 부족했고, 노사 관계의 중재자 역할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루스 교수는 “노사는 수익을 두고 싸우는 관계가 아니라 더 큰 수익을 위해 고민하는 관계가 돼야 하며, 이를 조정하는 ‘키플레이어’가 정부”라며 “그러나 호주 정부는 이런 역할을 못했고, 적절한 산업 발전 전략을 세우는 데도 실패했다”고 말했다. 여기에 그동안의 보조금 지원에 대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는 호주 내의 비판이 쏟아졌다.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노조 역시 책임이 크다. GM홀덴 노조는 회사가 어려울 때도 다른 제조업 근로자들보다 평균 1만 호주달러(한화 805만원)이상 높은 연봉을 더 받았다. 공장이 폐쇄 위기에 처하자 구조조정에 협조하고 3년간 임금을 동결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너무 늦었다. 자동차 부품회사 ‘브렘텍’의 스티브 크레티 이사는 “노조는 여론이 나빠지고 지원이 끊길 위기에 처하자 타협에 나섰지만 때를 놓친 것”이라며 “결국 국민들의 지지를 끌어내지 못했고 정부는 이를 기회 삼아 지원을 끊으며 산업 자체가 무너지게 됐다”고 말했다.

노조 역시 같은 후회를 하고 있다. 폴 디플리스 호주제조업노조 자동차분과 위원장은 “나름대로 사측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고 끝에 가선 임금협상 등에서도 양보를 많이 했지만, 결과적으로 자동차 산업을 꼭 살려야 한다는 인식을 심어주는 데는 실패했다”고 말했다.

전 세계에 걸쳐 구조조정을 진행 중이던 글로벌 GM 입장에선 호주 공장을 지키기 위해 정부나 노조에 애써 매달려야만 하는 상황도 아니었다. 현지에 맞춘 디자인 다변화나 기술 개발도 한참 뒤처져 있던 참이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계속 호주에 남겠다”고 광고까지 했던 GM은 결국 지원이 끊기자 곧장 철수를 결정했다.

호주산 차의 몰락을 직접 겪은 이들은 한국 역시 비슷한 상황을 겪지 않으려면 정부, 기업, 노조 모두의 각성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GM홀덴공장 실사에 참여한 ‘오스트레일리안슈퍼(호주 최대 연금펀드 운용사)’의 닉슨 애플 이사는 “호주나 한국처럼 내수시장이 작은 나라에선 통찰력을 가진 정부가 기술 개발이나 투자가 제때 이뤄지도록 돕고, 전체적인 임금 수준과 산업 전략을 잘 조정하며, 물 밑에서 노사관계를 중재하는 역할까지 해내야 산업이 지속할 수 있다”며 “지금처럼 정부·기업·노조가 서로 경계하고 불신하면 반드시 문제가 생길 것”이라고 지적했다.

노사관계 재정립이 필요하다는 점도 강조했다. 토니 에반스 호주제조업노조 산업육성 책임자는 “노사가 힘겨루기에만 몰두하면 기업은 언제든 떠나거나 망할 수 있고, 결국 일자리가 사라진다”며 “노사관계를 ‘회사 대 노조’의 대치로 생각할 게 아니라 더 많은 이익을 내기 위해 서로 협력하는 관계로 인식해야 한다”고 말했다.

멜버른·애들레이드=윤정민 기자 yunj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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