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8)|조선통신사 행렬에 배운 탈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새벽 다섯시에 엑시브호텔을 떠나 도바 (오우)를 거쳐 이세 (이세) 에서 급행열차로 갈아타고 쓰 (진) 시에 내린 것은 아침 열시가 조금 지나서였다.
시교육위원회를 찾았다. 물론 생면부지이기는 마찬가지나 본전선생의 사전 연락으로 문화재담당 주간 「다케니시」 씨 (죽서종부) 는 반갑게 맞이하여 주었다. 이곳을 찾은 목적은 율시에 전하는 3백년 전통의 「도진오도리」(당인용り)와 그리고 인근시인 스즈카(영녹)시의 같은 놀이에 대한 조사연구를 위해서였다.
이를 잘 알고 있었던 죽서씨는 『진시민문화』라는 계간지와 당인용보존회에서 나온 팸플릿등을 미리 준비해두고 있었다.
그는 곧 이지방 고로이며 향토문화연구가인 「시치리」(칠리귀지조) 옹의 집으로 안내하여 많은 것을 들려 주었으며 또 시내 히가시마루노우치 (동구지내) 에 있는 「분부정당인용보존회」로 나를 안내해 주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마침 보존회의 「오타」(태전돈웅) 회장은 일찌기 와세다대 상학부 출신으로 이지방 덕망있는 유지중의 한분이었다.

<중국놀이와 달라>
그는 보관하고 있는 유물(대기·가면등) 과 사진등 필요한 모든 것을 아낌없이 보여주었다. 그 중 무형문화재 『당인おどりと おうが정』라는 79년도 팸플릿에 의하면 『강호시대 조선과 일본은 선린우호를 위해 그 중심적 역할을 수호사절단들이 담당했다.
이 놀이는 당시 조선사절단의 행렬을 모방한 것으로 진번주 등당고흠공의 천거로 팔번신사의 추제인 각정 산차놀이와 함께 행렬에 참여한 것이 그후 자자손손들에게 전하여 오늘에 이르렀다』고 그 유래를 밝히고 있으며, 시민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무형문화재」로 전국적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고 한다.
한편 이 놀이의 명칭이 「당인용」이라하여 그 기원설을 중국의 놀이라고 하는 주장과 또 한편으로는 주로 상인들간의 이국적인 색채가 짙다고 하여 일찌기 폴란드상인의 상륙등으로 혹은 폴란드인의 민속춤이 아닌가 하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이는 모두 신빙성이 없다. 이와 같은 놀이는 우시마도(강산현 우창)에도 『당자용』(가라코오도리)이란 놀이가 있고 시코쿠(사국)·규슈(구주)등지에는 여러 곳에 왕란때 포로로 잡혀와 집단을 이루고 사는 조선인촌을 그들은 당인정이라고 부르고 있다.

<유물 대기하나뿐>
「당」과 「한」·「신」은 그들 음으로는 다 같은 「가라」로 이는 우리 동해에 면하고 있는 그들 시마네 (도근)현 대전시의 「가라가미진자」(한신신사), 「가라지마」 (신도), 「가라우라」 (신포) 등의 용례가 그러하다.
그러면 이 놀이를 계승코자 하는 보존회의 유물과 이놀이의 시기·목적·방법과 구성, 그리고 이곳이 과거에 조선통신사가 지나던 길목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율시와 영녹시에 지금도 남아있는 「당인용」, 일명 「당인항렬」의 그유입 과정에 대하여 살퍼보기로 하자.
현재 남아있는 과거의 유물로는 진시분부정당인용보존회에 있는 대기 하나밖에는 없다. 이는 폭이 약70cm에 길이 2cm정도의 붉은색 비단에 용이 하늘로 솟는 모양을 수놓은 깃발로 둘레에는 수술이 달려있다. 이를 「대치 일류 분부정당인용り보존회」라 쓴 큰 나무상자 속에 넣어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으며 (실제 사용은 불가, 그때그때 새로 만들어씀) 그외 가면 10개가 있다.
전래 가면과 악기·의상등은 모두 제2차대전때 불타버리고 현재의 가면은 종전후에 만든 것으로 한국인의 얼굴을 희화화하고 있다. 이는 박으로 만든 호제가면으로 모두가 남자탈이며 마치 소박한 우리나라 희극적인 광대탈을 그대로 옮겨 놓은 모양이었다.
이 놀이는 벌써 지역적 제례로 율시에서는 10월17일, 영녹시에서는 4월14일로 각각 나누어 봄에는 춘제, 가을에는 추수감사제와 같은 오곡성취와 풍농을 기리는 시민의 대축제로 발전해 있다.

<관중앞에서 촌담>
먼저 진시의 행렬과 그 구성 차례를 보면 다음과 같다.
일행은 일렬행진으로 「분부정」이라 쓴 정인 (정기) 을 선두로 붉은색 대기, 황색 청도기, 적·황 나팔수2인, 그사이에 광인3∼4명(용자·이들의 위치는 사실상 일정치 않음), 피리 2인, 징(바라) 2인, 대고·소고 2인, 황색삼각령기, 그 뒤에 의관을 정제하고 부채를 든 대장군 (조선통신정사를 의미), 해가리개를 든 종자, 궁시를 잡은 중관 2인, 악령을 쫓고 행렬의 안전을 비는 사사라 (범) 라는 종자 4인, 그리고 맨뒤에 청도기와 대기가 또하나 따른다. (87년에 나온 「분부정당인용り」 회권 참조)
그리고 정사 (대장군) 를 제외한 23인 전원은 둥근 패립에 해학적인 한국의상을 하고 있으며 유독 광대 4명은 희화화된 한국 광대탈을 쓰고 일시 행렬이 정지되는 곳마다 나와 관중앞에서 일장의 희극과 재담·묘기등을 연출한다.
이때 광대패의 놀이는 다른 놀이에 비해 우선 도약이 심하고 해학적이다. 어깨·팔·다리의 놀림이 유난히 크고 활달하여 일본의 전통무용과는 본질적으로 같지 않다.
그 놀이의 양태는 율시나 영녹시의 것이 다를 것 없으나 행렬의 구성은 다소 상이한 데가 있다. 영녹시의 경우 그들은 매년 4월14일 미도원신사의 분사로 되어 있는 오두천왕신사의 신사의식으로 행하여진다. 즉 사신 (청룡·백호·주작·현무)과 치자·신여의 순서에 이어 진시와 같은 광대복에 광대탈을 쓴 3, 4인의 무용수가 천왕사를 출발, 이곳 동안사·연화사, 그리고 장로택을 순방하며 징과 북의 장단에 맞추어 같은 모양의 춤을 춘다.
천란후 1607년에서 1811년, 12회에 걸친 조선통신사의 내왕은 그들 일본인에게는 큰 이득이었을 뿐더러 우리의 선진문화를 그들이 받아들이는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물론 처음 1, 2회에서는 천란후의 포려귀환이라는 가슴아픈 사명을 띠고는 있었지만 3, 4회를 거듭할수록 이들 행차가 가는 길목과 머무르던 곳에는 유형·무형의 많은 유물과 일화들을 남기고 있다.

<「조선인가도」 남아>
이들은 정사·부사·종사관·제술관·서기외에도 사자관·화공·의원·기치·군악대및 삼사가 부리던 소동20여명을 포함, 무려 5백명에 가까운 일행이 부산을 출항, 대마·일기섬을 지나 뇌호내해를 항행, 진화항·병·우창·실률에 기항, 환대를 받고 병고에서 정천·경도에서 다시 그 행렬을 갖추어 육로로 접어들며 아름다운 음곡과 행진으로 일인들을 놀라게 했다.
지금도 자하현의 근강팔번시 근교, 안토성지 부근에는 「조선인가도」라는 호칭이 남아 있다. 그 근강로에서 다시 미농로·미장평야로 들어가 명점옥·빈송·정강·상근을 지나 소전원·대기·신내천·품천·강호로 들어가면서 사농공상·문인과 서민들을 접촉하고 우호를 나누었다. 일본측에서도 막부의 명에 따라 연도인 각번에 일체의 경비와 지원·숙박에 만전을 기하게 하였으므로 실로 놀라운 국빈의 대우였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지금 그 유형으로 남겨진 이곳 율시대부정의 역사를 보면 원래 그곳은 소위 그들이 말하는 「세키가하라(관ケ원)전」 (1600·경장5년)의 전초지로 「도쿠가와이에야스」 (덕천가강)편이었던 오우가(분부)민족의 승리와 그 전적을 기리는 지명이기도 하였다. 한편 분부정사람 (분부민족)등은 일찌기 무사로서의 투혼과 상재를 겸비한 사람들이었다고도 한다.
그리하여 덕천가강이 강호에 막부를 개설하자(1903년) 이들은 곧 점포를 강호일본교대전마정으로 옮겨 소위 「이세상인」 내지는 이세인의 상혼을 유감없이 드러내기도 하였다. 그래서 분부정의 그들은 강호일본교대전마정에서 조선통신사의 성대한 행렬을 실제로 목격했으며 그것을 향리인 이세의 율시로 옮겨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 아닌가 한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