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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 따졌나, 단순 착오였나…여야 3당대표 '의문의 노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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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남북정상회담의 일환으로 남북 정당관계자 면담이 예정된 18일 오후 안동춘 북한 최고인민회의 부의장 일행이 남측에서 온 정당 관계자들을 기다리고 있다. 이해찬, 정동영, 이정미 대표는 한 시간 이상이 지나도록 면담장에 도착하지 않아 행사가 취소됐다. [뉴스1]

평양남북정상회담의 일환으로 남북 정당관계자 면담이 예정된 18일 오후 안동춘 북한 최고인민회의 부의장 일행이 남측에서 온 정당 관계자들을 기다리고 있다. 이해찬, 정동영, 이정미 대표는 한 시간 이상이 지나도록 면담장에 도착하지 않아 행사가 취소됐다. [뉴스1]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 등 3당 대표가 평양 남북 정상회담 일정 중 북한 대표단과의 면담 자리에 사전 통보 없이 나타나지 않은 ‘노쇼(No Show)’ 논란이 일고 있다.

이 대표와 정동영 민주평화당, 이정미 정의당 대표 등은 방북 이틀째인 19일 오전 10시 평양 만수대의사당에서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안동춘 최고인민회의 부의장 등과 만났다. 그러나 전날 벌어진 ‘의문의 사건'에 대한 뒷말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한국 정당 대표단은 18일 안동춘 최고인민회의 부의장을 대표로 하는 북한 대표단과의 면담에 모습을 보이지 않아 면담이 불발됐다. 북한 대표단은 면담 예정 시간인 3시 반보다 일찍 도착해 기다렸지만, 한국 대표단이 1시간 가까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자 한국 취재진에게 “이런 경우가 다 있느냐. 납득할 수 없다”고 불쾌함을 표시하기도 했다.

이후 이정미 대표는 숙소인 고려호텔에서 한국 취재진을 만나 “그 시간에 정당 대표끼리 간담회를 했다”고 설명했고, 이해찬 대표는 “일정을 재조정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당시 상황이 단순한 실수가 아니었을 것으로 보이는 정황이 속속 나오고 있다. 윤영찬 청와대 국민소통수석은 이날 오전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프레스센터에서 전날 여야 3당 정당대표가 북한 대표단과의 면담 자리에 사전 통보 없이 나타나지 않은 것에 대해 “정당 대표의 일정은 확인이 어렵다”며 즉답을 피했다. 윤 수석은 이어 “그 부분에 대해서는 평양에서 우리 대표단 내의 얘기가 별도로 있을 것”이라며 당사자들의 해명이 있을 것을 시사했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이해찬 대표가 결자해지(結者解之·매듭을 묶은 사람이 풀어야 한다)해야 한다”는 말도 했다.

정당 대표단 3인은 왜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않았을까. 남북 정상이 2박 3일간 만나는 대규모 국가 행사에서 면담 상대 측에게 아무런 설명 없이 불참했다는 건 결례로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네티즌들의 비난 글들이 쇄도했다. “이게 장난하자는 건지 뭔지 모르겠다. 국회의원이자 특별 수행원 신분으로 회담에 참석했으면 회담에 협조해야지, 자기들끼리 간담회를 하는 게 맞느냐. 국민들은 그들의 만행에 분노하고 있다” 등의 내용이다.

정확한 경위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정치권에서는 대략 세 가지로 관측이 나온다.

여당 대표 예우 안 해 불만?

먼저, 정당 대표단이 북한 대표단의 급(級)을 따졌을 가능성이다. 최고인민회의는 한국의 국회와 같은 기능을 하는 북한의 최고주권기관인데, 이곳의 의장은 최태복(한국의 국회의장 격)이다. 휴회 중에는 김영남 상임위원장이 대표이며 대외적으로는 국가를 대표하는 역할도 한다.

실제 이해찬 대표는 지난 17일 기자간담회에서 방북 중 남북 국회회담 의사를 타진할 계획을 밝히면서 최태복 의장의 이름을 언급했다. 정동영 대표도 18일 방북 전 라디오 인터뷰에서 ‘이번에 가서 누구를 만나게 되느냐’는 사회자의 질문에 “최고인민회의라는 대의기관이 있는데, 우리 국회하고는 사뭇 다르지만 거기 의장이 최태복 의장”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실제 면담 대상자는 그보다 아랫급인 안동춘 부의장과 ‘형식상 야당’인 이금철 조선사회민주당 부위원장 등이었다. 안 부의장은 한국 국회 부의장급이자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이긴 하지만, 조선문학예술총동맹 중앙위원장 등을 겸임하는 등 문화계 인사로 분류된다. 이에 정당 대표단이 면담 상대의 격을 따지며 일정을 조정했을 수 있다.

18일 오후 평양 중구역 만수대의사당에서 평양남북정상회담 특별수행원-김영남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면담이 열리고 있다. [뉴스1]

18일 오후 평양 중구역 만수대의사당에서 평양남북정상회담 특별수행원-김영남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면담이 열리고 있다. [뉴스1]

또 다른 가능성은 정당 대표단이 이보다 격을 높여 김영남 상임위원장을 먼저 만나고 싶어했을 수 있다는 점이다. 같은 시각 김 상임위원장은 평양 만수대의사당에서 정당 대표단과 일부를 제외한 공식·특별수행원들과 환담했다. 이해찬 대표는 방북 전 “나와 인연이 있는 북측 인사들이 있는데, 이번에 가서 그분들을 만나고 싶다”며 김 상임위원장의 이름을 거론했다.

이해찬 대표는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 2005년 4월 아시아-아프리카 정상회의, 2007년 3월 북한 민화협 초청 방북 등을 계기로 김 상임위원장과 만나 면담한 적이 있다. 정동영 대표는 2005년 6월 통일부 장관 때 방북해서, 이정미 대표는 2005년 8월 민주노동당-조선사회민주당 교류 대표단으로 방북해 김 상임위원장을 만나 세 사람 모두 구면이다. 이에 청와대 측에 먼저 김 상임위원장을 만나고 싶다는 의사를 전달했을 수 있다. 결과적으로 이들은 이날 바뀐 일정에 따라 김 상임위원장을 먼저 만났다.

마지막은 단순히 일정을 헷갈렸을 가능성이다. 이정미 대표의 말대로 “일정 착오”가 있었을 수 있지만 직접 수행하는 국회 직원 1명과 함께 방북한 만큼 쉽게 납득이 되지는 않는 상황이다.

김성태, “이 대표, 격 제대로 따져라”

김성태 자유한국당 원내대표가 19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비상대책위원회-중진의원 연석회의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뉴스1]

김성태 자유한국당 원내대표가 19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비상대책위원회-중진의원 연석회의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뉴스1]

야당은 정당 대표단의 ‘노쇼’ 사태를 일제히 비판했다. 김성태 자유한국당 원내대표는 이날 당 회의에서 지난 17일 이해찬 대표가 “격이 안 맞다”며 김병준 한국당 비상대책위원장의 정책 토론 제안을 거부한 것을 언급하며 “이해찬 대표가 애초부터 대통령 수행에 나선 것이 격에 안 맞는 일임에도, 자발적으로 나서서 수행단을 자처해놓고 최고인민회의 부위원장과 면담을 일방적으로 무산시킨 건 무슨 경우인가. 이 대표는 급과 격을 따지려면 제대로 따져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하태경 바른미래당 최고위원은 라디오 인터뷰에서 “어떤 이유에서건 용납될 수 없다. 만약 북한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면 숙청 대상이다. 3당 대표가 한국에 오기 전에 북측에 진심으로 사과하고 결자해지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평양=공동취재단, 하준호 기자 ha.junho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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