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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안혜리 논설위원이 간다

"서울시가 알면 뒷감당 못해요"···핀테크 업체는 익명 당부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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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안혜리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안혜리 논설위원이 간다] “차라리 아무 일도 하지 않았으면” 

“죄송합니다. 드릴 수 없어요. 우리가 언론에 협조한 걸 서울시가 알면 그 뒷감당을 어떻게 하라구요. 블랙리스트에라도 오르면 우리 같은 작은 업체는 사업하기 정말 어렵습니다.”

부처간 엇박자에 죽어나는 핀테크 스타트업 #대통령·서울시장 핀테크 육성 공언 #없던 규제 만들어 발목 잡는 현실 #은행 외에 해외송금 허용한다더니 #금융회사 등록으로 오히려 투자 막아 #한국이 2014년 규제에 머무른 사이 #주도권은 싱가포르 등에 넘어가

대단한 기밀자료도 아닌 그저 홍보일정 공문이었다. 서울시가 지난 6월 지난해에 이어 두번 째로 선정한 ‘모바일 소액외화송금’ 시범사업자와 관련해 시의 해당부서 팀장에게 마케팅 일정을 문의했더니 “담당자가 휴가 중이라 알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선정된 핀테크 업체 한 곳에 대신 물어봤을 뿐인데 ‘블랙리스트’ 운운하는 답변이 돌아와 당황스러웠다.

정부 두 부처(기획재정부와 중소벤처기업부)간 엇박자로 투자를 못 받아 곤란을 겪고 있는 다른 해외 송금 핀테크 스타트업체들도 마찬가지였다. “이 말도 안 되는 일을 분명 알려야 하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 회사 이름이 언급되면 절대 안 된다”고 당부 또 당부를 거듭했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기회 있을 때마다 “핀테크 스타트업을 육성하겠다”며 올 4월 기존 금융위의 핀테크 지원센터와는 별도로 ‘핀테크 랩’까지 만들었다. 문재인 대통령도 핀테크 관련 행사에 잇따라 참여하면서 핀테크 산업을 키우겠다는 의지를 내비쳤다. 정부와 지자체가 발 벗고 도와주겠다는데 정작 스타트업들은 도움을 받기는커녕 오히려 불이익을 보지 않을까 겁을 먹고 있었다. 정치권이 혁신을 외치고, 공무원은 돕겠다고 나설 때 현장에선 거꾸로 곡소리가 나는 이유를 해외송금 서비스를 하는 스타트업을 통해 들여다봤다. 비단 핀테크 스타트업계에서만이 아니라 지금 대한민국 곳곳에서 벌어지는 얘기다.

#서울시의 오지랖

박원순 서울시장도 앞서 지난 4월 ‘핀테크 랩’을 만들며 핀테크 스타트업 육성 의지를 밝혔다. 정부와 지자체가 앞다퉈 핀테크 관련 규제 혁신을 하겠다고 공언했지만 현실은 전혀 다르게 돌아간다. [뉴스1]

박원순 서울시장도 앞서 지난 4월 ‘핀테크 랩’을 만들며 핀테크 스타트업 육성 의지를 밝혔다. 정부와 지자체가 앞다퉈 핀테크 관련 규제 혁신을 하겠다고 공언했지만 현실은 전혀 다르게 돌아간다. [뉴스1]

“제발 서울시는 그냥 아무 일도 안 했으면 좋겠어요.”

역시 익명을 요구한 한 핀테크 스타트업 대표가 “서울시의 오지랖에 업계만 죽어난다”며 털어놓은 하소연이다. 사연은 2016년 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서울시는 “지자체 최초로 핀테크 외화송금 서비스를 추진하겠다”며 시범사업자 선정 공고를 냈다. 당시는 은행이 아니어도 외화송금 서비스를 할 수 있도록 정부가 규제 완화에 나서 핀테크 스타트업이 하나둘 생겨나던 시기다. 금융위원회는 런던에서 한국 스타트업 알리기 행사를 열면서 가상화폐를 활용한 해외송금 스타트업 등을 데려가기도 했다.

그런데 서울시가 숟가락을 얹으면서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이미 해외송금 영업을 하고 있는 와중에 굳이 서울시가 지원사업을 한다고 나서면서 기재부가 제도 정비를 이유로 급제동을 건 것이다.

“첨단산업일수록 서비스가 앞서나가고 법이 뒤따라가다 보니 불법도 합법도 아닌 회색지대가 생겨나지 않습니까. 당시 핀테크 스타트업의 외화송금이 딱 그랬거든요. 시범사업이 가능하다고 판단했는데 기재부에 문의하니 법을 제대로 갖출 때까지 보류하라고 요구한 거죠.” (서울시 구자영 금융산업팀장)

기재부는 2017년 2월 입법예고를 거쳐 7월이 돼서야 등록 업체에 한해 건당 3000달러 미만, 연간 1인당 누적 2만 달러 미만의 해외송금이 가능하도록 법을 바꿨다. 서울시는 기재부 요청에도 불구하고 법 개정 전인 3월에 사업기간 1년짜리의 시범사업자 3곳을 선정해 발표했다. 이들 업체는 법이 시행되자마자 부랴부랴 등록을 서둘렀다. 하지만 기재부의 깐깐한 서류 구비 요청에 그 해 12월이 돼서야 3곳 모두 등록을 완료했고 결국 올 3월 서울시와는 아무런 사업도 해보지 못한 채 시범사업자 지위를 잃었다. 법의 테두리 안에서 보자면 서울시가 무자격자를 파트너로 삼고는 정작 법 정비 후 방치한 셈이다. 이유는 다르지만 올해 새로운 시범사업자를 재공모하는 과정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하지만 다들 서울시가 무서워 입도 뻥긋 못 한다.

이 과정에서 시범사업과 무관한 20여 개의 다른 해외송금 관련 모든 핀테크 스타트업들에까지 뜻밖의 불똥이 튀었다. 정부가 해외송금 서비스를 하는 스타트업을 금융회사에 편입시키는 바람에 오히려 투자가 막혀버린 것이다.

#부지런한데 게으른 규제본능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달 7일 서울시청에서 열린 인터넷 전문은행 규제혁신 행사를 찾아 설명을 듣고 직접 시연을 하기도 했다. [뉴스1]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달 7일 서울시청에서 열린 인터넷 전문은행 규제혁신 행사를 찾아 설명을 듣고 직접 시연을 하기도 했다. [뉴스1]

“투자사가 더 적극적이었어요. 그런데 일단 모든 투자가 중단된 상태입니다. ”

올초 한 해외송금 스타트업은 유명 벤처캐피털 두 군데로부터 동시에 투자를 받기 직전에 무산됐다. 이 회사 대표는 “우리는 비교적 자금사정이 좋은 편이라 아무 문제가 없지만 다른 몇몇 업체는 꽤 어렵다고 들었다”고 전했다. 실제로 지난해 여러 벤처캐피탈에서 수십 억원의 투자를 받았던 또 다른 스타트업은 올해엔 사실상 투자가 뚝 끊겼다. 모바일 해외송금 업체 한패스는 지난 3월 한국투자파트너스로부터 30억 원의 투자를 받았지만 자칫 투자가 무산될 위기를 겪었다. 핀테크산업협회 부회장인 이 회사 김경훈 대표는 “투자받기로 다 정해졌는데 자금집행 과정에서 금융회사 투자금지 조항이 불거져 투자사나 우리나 다들 당황했다”며 “모태펀드가 아닌 다른 사모펀드를 동원해 결국 우회적으로 투자를 받기는 했지만 한 달 이상 투자가 늦어졌다”고 말했다.

한국에선 많은 스타트업체들이 정부가 조성한 3조 4000억원 규모의 모태펀드 투자에 기댄다. 이 펀드는 중소·벤처기업 육성이라는 목적이 분명하다 보니 금융회사에는 투자할 수 없다. 과거엔 아무 문제 없던 이 조항이 발목을 잡았다. 기재부가 규제를 풀어준다며 외환거래법을 개정해 핀테크 스타트업을 금융회사에 편입시키자 자기자본 20억 원에 불과한 스타트업이 금융회사라는 이유로 투자를 못 받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빚어진 것이다.

기재부가 스타트업을 금융회사로 만드는 대신 스타트업에 해외송금을 허용하는 길을 열어줬거나, 아니면 중기부가 미리미리 충돌되는 법을 지난해 7월 외환거래법 개정에 맞춰 바꾸기만 했어도 벌어지지 않았을 일이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로 흘렀다. 그냥 내버려 두면 좋았을 기재부는 너무 부지런하게 법에 손을 대고, 빨리 보조를 맞춰야 할 중기부는 너무 굼뜨게 움직인 탓에 죄 없는 기업들 속만 타들어 갔다. 현장에서는 아우성인데 기재부나 중기부 모두 태평하기만 하다.

기재부는 자본금 요건을 낮춰주는 등 해줄 건 다 해줬다며 업계를 돕기만 했을 뿐이라는 입장이다. 주현준 외환제도과장은 “당연히 부처간 협의하고 업계와도 상의했으나 법 개정 당시 이 문제는 핵심 이슈가 아니었다”며 “투자 못 받는다고 당장 운영을 못 하는 것도 아니지 않느냐”고 되물었다. 중기부도 할 말이 있다. 이상창 투자회수관리과장은 “핀테크 금융회사가 투자받을 수 있는 내용 등을 담은 벤처투자촉진법 제정을 지난 2월 입법예고했다”며 “외환거래법 개정 당시 이 문제를 알기는 했지만 개별 법 조항을 바꾸기보다 벤처투자촉진법 안에 한 번에 담으려다 보니 약간의 시차가 생겼을 뿐”이라고 말했다. 그는 “엄연히 법이 있으니 중기부가 유권해석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고 일단 기존 벤처기업법 시행령을 바꿔 빠르면 올 연말에 투자가 가능하도록 할 방침”이라고 덧붙였다.

#끝없이 벤치마킹만

기업 규제 부담 적은 나라

기업 규제 부담 적은 나라

은행이 독점하던 해외송금 업무를 인터넷은행과 핀테크 스타트업이 할 수 있게 해주자 혜택은 일반 소비자들에게 곧바로 돌아갔다. 수수료가 크게 낮아진 데다 송금시간도 확 줄었기 때문이다. 국제금융센터가 공개한 세계은행 자료에 따르면 한국의 해외송금 수수료율은 2017년 2분기 5.42%에서 3분기 4.81%로 전 세계적으로 가장 큰 폭의 하락세를 보였다.

가령 2014년만 해도 고작 5만원을 필리핀으로 보내려면 직접 은행에 찾아가서 수수료로만 따로 2만~3만원을 내야 했지만 지금은 케이뱅크나 카카오뱅크를 이용하면 모바일로 간단히 건당 5000~1만원만 내면 된다. 한패스도 건당 5000원이다. 여기에다 기존 은행에선 2~5일 걸리던 송금 시간도 크게 줄었다. 프리펀딩이라는 새로운 기법으로 웬만한 지역의 송금 시간은 하루 이내로 단축했다. 그런 편리함 덕분에 지난달 2만 4000여 건을 처리하는 등 매달 200억~300억 원을 해외로 송금하고 있다. 하지만 연 14조원에 달하는 한국의 전체 해외송금 시장 규모에 비하면 핀테크 스타트업의 존재감은 거의 없다시피 하다.

규제 완화를 했다고는 하지만 발목잡기가 여전한 탓이다. 암호화폐를 활용하면 훨씬 혁신적인 서비스가 가능하지만 정부가 암호화폐 거래 불가 지침을 내렸고, 그 사이 국내 기업이 주도권을 잡아나가던 해외송금 시장은 싱가포르 같은 해외 스타트업에 고스란히 넘어갔다. 모른 척 해야 할 때는 눈을 밝히고, 서둘러야 할 때는 한없이 더딘 한국 정부와 달리 싱가포르는 규제 전반을 뜯어고치며 핀테크 활로를 열어줬기에 벌어진 대조적인 결과다.

왜 우리는 그냥 믿고 버려두지 못하는 걸까. 기재부 주 과장은 “해외송금은 굉장히 위험한 영역”이라며 “자금세탁이나 테러자금에 흘러갈 가능성을 차단하려면 관련법 정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구태언 테크앤로 변호사는 “우리 정부는 허용하면 안 되는 논리를 어떻게든 찾아내 기어이 법을 바꾸면서까지 새로운 산업을 막아 버린다”며 “2014년 규제개혁 대토론회 당시에도 다른 나라에 비해 국내 핀테크 산업이 5년 늦었다고 부산을 떨었는데 5년 가까이 지난 지금 거기서 한발도 더 나아가지 못했다”고 안타까워했다.

공무원들이 손 놓고 놀아서 그런 게 아니다. 오히려 너무 열심히 한 게 문제다. 금감원은 올해 들어서만도 핀테크 육성 방안을 배워보겠다며 중국 선전에 다녀왔고 올 연말엔 싱가포르로 또 공부하러 떠난다. 그런데 비트코인 투자 같은 첨단산업이 등장하기만 하면 가장 먼저 매를 드는 게 이런 감독기관이니 배워서 어디에 써먹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안혜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