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사법부 독립 지켜낼 대법관 인선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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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7월로 예정된 대법원 개편을 앞두고 사법부 안팎의 관심이 뜨거워지고 있다. 대법관 5명이 바뀌는 이번 개편으로 이용훈 대법원장 취임 이후 전체 대법관(대법원장 제외) 12명 가운데 3분의 2인 8명이 교체된다. 대법원은 주말께부터 후보자들을 추천받고 다음 달 초 대법관 후보 제청자문위원회를 열어 대법원장에게 추천할 계획이어서 6월 중순이면 대통령에게 최종 임명제청될 것으로 보인다.

이번 대법원 개편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지난해 11월 임명된 대법관 3명 가운데 2명을 진보적 인물로 분류할 수 있어 새 대법관들의 성향이 사법부의 색깔을 좌우할 수밖에 없다. 더구나 8월과 9월 헌법재판소 재판관 5명도 임기가 끝나 새 얼굴로 채워진다. 특히 사법부 구성원의 성향은 나라의 운명과도 직결된다. 최근 들어 정치적 대립과 갈등이 첨예한 쟁점들은 결국 사법적 판단에 의해 그 방향이 결정되는 사례가 늘고 있기 때문이다. 노무현 대통령 탄핵심판 사건과 행정도시 건설, 새만금사업 등이 대표적이다.

이용훈 대법원장은 지난해 9월 법원 구성원들의 기대와 박수를 받으며 사법부 수장으로 취임했다. 그는 취임사에서 "독재와 권위주의 시대를 지나면서 사법부는 정치권력으로부터 독립을 제대로 지켜내지 못하고, 인권보장의 최후 보루로서 소임을 다하지 못한 불행한 과거를 갖고 있다"고 고백했다. 그러면서 사법부 구성원이 모든 열정을 재판에만 기울여 소신 있는 판단을 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기 위해 "사법권의 독립을 훼손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취임 후 처음 행사한 그의 대법관 임명제청은 대다수 법관을 실망시켰다. 대법원 구성을 다양화한다며 재야 법조계나 시민단체 등의 지지를 받은 인사를 우대한 반면 정통 법관은 한 명만 발탁했다. 판결 성향을 다양화하겠다고 정통 법관들을 홀대했고, 출신 대학을 다양화한다며 서열을 파괴해 버린 것이다. 그러다 보니 법관 사이에선 "법원에 남아 묵묵히 재판하는 것보다 몇몇 재야단체에 잘 보이는 게 출세의 지름길"이란 자조적인 말마저 나온다. 올 들어 지난 4월까지 법복을 벗은 법관이 80명에 이른 것도 이런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대법원 구성을 다양화하는 것은 바람직하다. 사회 변화에 따른 다양한 분쟁을 판단할 수 있는 여러 분야의 전문 법관들이 필요해서다. 문제는 권력 주변 인사나 일부 시민단체 등에서 '다양화'를 내세워 자신들과 정치적 코드가 맞는 인물로 대법원을 채우려 한다는 점이다. 대법관 인사가 '코드 인사'로 흐를 경우 민주주의의 근본이 위협받는다. 사법부가 권력을 견제하지 못한다면 3권분립의 원리가 무너지기 때문이다. 사법권 독립이 흔들려서는 안 되는 이유다.

사법부가 정치권력이든, 시민단체든 '외풍(外風)'을 막지 못할 때 사법권 독립은 기대할 수 없다. 이번 대법관 인사도 마찬가지다. 사법권의 독립은 외부에서 그냥 주어지는 게 아니다. 사법부 구성원 스스로가 혼신을 다해 지켜나가야 한다. 그 책임의 꼭대기에 이용훈 대법원장이 있다. 대법원이 '코드'가 아니라 오로지 법과 양심에 따라 재판함으로써 사법권 독립을 지켜낼 수 있는 인물로 채워져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미국의 사법부를 행정부와 의회의 확실한 견제자로 끌어올린 것은 존 마셜 연방대법원장이었다. 1803년 마버리 대(對) 매디슨 사건(Marbury vs Madison)에서 위헌법률심사권이 사법부에 있음을 선언한 것이다. 이 대법원장은 노 대통령 탄핵심판 사건의 대리인을 맡았던 전력이 있다. 이로 인해 그에게 그런 의지가 있는지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번 대법관 인선을 통해 그것이 기우임을 보여주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