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의 달'이 무색한 가정폭력 세상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세계적인 여배우 제니퍼 로페즈가 3년 전 열연했던 영화 '이너프(Enough)'를 본 적이 있는지….

바람둥이 남편이 휘두르는 가정폭력으로부터 필사적으로 도망치는 여성의 심리를 잘 그린 영화였다. 무술을 닦아 폭력에는 폭력으로 맞서 남편을 살해하는 피날레 장면이 끔찍했지만 가정폭력 피해 여성들의 복수심을 잘 표현했던 것 같다.

5월은 '가정의 달'. 그러나 가정폭력의 현 주소는 아직도 끔찍하다.

열린우리당 박명광 의원이 16일 경찰청.여성부의 가정폭력 관련 자료를 분석한 결과 경찰.검찰.법원 등 공권력의 방치 속에 가정폭력 발생건수는 꾸준히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경찰청 자료에 따르면 가정폭력 발생건수는 2003년 1만6408건, 2004년 1만3770건, 지난해 1만1595건으로 감소했다. 지난해 발생건수 중 82%(9549건)는 '아내 학대', 2.3%(276건)는 '남편 학대', 1.5%(178건)는 '노인 학대'였다.

경찰이 가정폭력 때문에 검거한 인원은 지난해의 경우 1만2775명. 그중 신체적인 폭력을 행사하다 잡힌 피의자는 5174명이었다.

그러나 여성부 통계에 비하면 이런 수치는 '새발의 피'다. 가정폭력상담소의 상담 건수는 2003년 9만9376건에서 2004년 7만4056건으로 급감했다. 그러다가 지난해엔 10만74건으로 껑충 뛰어올랐다. 신체적인 폭력 건수는 경찰 통계보다 10배나 많은 5만6264건이나 됐다.

신체적 폭력에 관한 한 경찰청 통계에 따르면 매일 14건, 가정폭력상담소에 따르면 154건이 일어나고 있다는 얘기다. 경찰과 여성부가 가정폭력의 심각성에 대해 전혀 다른 인식을 하고 있는 셈이다.

왜 이런 현상이 빚어지는 것일까.

박명광 의원은 "가정폭력 가해자에 대해 경찰.검찰이 안이하게 대응하거나 솜방망이 처벌을 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예컨대 남편의 폭력에 시달리다 못해 경찰서에 신고했으나 담당 경찰관이 조서를 찢어버린 사례가 있다고 한다. 또 폭행을 참지 못해 경찰에 신고하면 '남편이 아내를 너무 사랑해서 그런 것'이라며 화해를 종용했던 사례도 있다.

검찰도 가정폭력을 처벌하는데 소극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박 의원은 "검찰이 지난해 가정폭력사범 1만5454명 중 1.5%인 244명을 구속한 데 그쳤다"고 설명했다. 더욱이 법원에 가면 가정폭력 사건은 완전한 '찬밥'신세다. "서울가정법원에는 가정폭력 담당판사가 1명만 있고 혼자서 연 2000여 건의 사건을 담당한다"고 박 의원은 주장했다. 그 결과 사건이 접수돼도 '미제 사건'으로 남는 일이 수두룩하다는 것이다.

외국인 여성에 대한 가정폭력도 급증 추세다. '여성 긴급전화 1366'에 상담한 외국인 여성은 2003년 199명에서 2004년 267명으로 늘어나다가 지난해엔 무려 1708명이나 됐다. 대부분 한국 남성과 결혼한 이들 여성의 국적은 중국-베트남-필리핀-러시아-태국-몽골 순으로 많았다.

박명광 의원은 가정폭력을 막을 강력한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예방 차원에서 가정폭력이 한 가정, 한 인간을 파멸시킨다는 사실을 적극 교육하되 관련 법률을 개정해 국가 차원에서도 강력히 개입하고 처벌해야 한다는 논리다.

박 의원은 "피해자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임시조치'를 신청할 수 있도록 하되 법원이 가해자에게 '100m 접근금지'조치를 내릴 때 통신수단 등도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가정폭력 가해자에 대한 법원의 보호처분 기간을 1년(현행 6개월), 사회봉사시간을 200시간(현행 100시간)으로 강화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이양수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