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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파블로 카잘스, 새들의 노래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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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9호 35면

오민석 문학평론가 단국대 교수·영문학

오민석 문학평론가 단국대 교수·영문학

비 내리는 밤, 파블로 카잘스가 연주하는 ‘새들의 노래’를 듣는다. 카잘스의 첼로 연주로 유명해진 ‘새들의 노래’는 카잘스의 조국 카탈루냐의 민요이자 크리스마스 캐럴이다. 독수리, 참새, 방울새, 홍방울새, 개똥지빠귀, 나이팅게일, 딱새, 굴뚝새, 카나리아, 숲종다리, 박새. 후투티, 딱따구리 등, 온갖 새들이 예수의 탄생을 찬미하는 가사를 담고 있는 이 노래는 그러나 내용처럼 즐겁거나 행복하지 않다. 캐럴답지 않게 이 노래는 심각하고 처연하며 슬프고 장엄하다. 미국 포크가수 존 바에즈가 ‘새들의 캐럴’이라는 제목으로 파블로 카잘스에게 헌정한 것으로도 유명한 이 노래는, 1939년 망명 이후 1973년 세상을 뜰 때까지 다시는 조국으로 돌아가지 않은 카잘스에게는 애절한 망향가였다.

공화주의자이자 평화주의자였던 카잘스는 스페인내란 이후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지원으로 파시스트 프랑코 정권이 들어서자 조국을 떠났으며, 정치적 ‘중립’을 명분으로 이탈리아, 프랑스, 영국, 독일 등 유럽의 다수 국가들이 프랑코 정권을 인정하자 오랜 세월 동안 해당 국가들에서의 공식적인 연주를 중단했다. 프랑코는 카잘스가 97세의 나이로 사망한 지 2년 후에야 죽음으로써 카잘스가 영원히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하도록 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스페인 동북부에 위치한 카탈루냐는 1930년대 초중반 자치권을 획득하였으나 프랑코에 의해 자치권을 빼앗겼고 카탈루냐어는 공용어의 지위를 박탈당했다.

삶의 향기 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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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잘스는 음악으로 ‘평화’를 노래한 대표적인 예술가 중의 한 명이었다. 그는 죽을 때까지 거의 모든 연주회마다 마지막 곡으로 ‘새들의 노래’를 선택했다. 1961년 11월 3일, 자신이 존경해마지 않던 케네디 대통령의 초청으로 백악관에서 연주회를 할 때에도 그는 마지막 곡으로 “새들의 노래”를 연주했다. 그는 종종 이 곡을 “망명자들의 주제곡”, “내 조국의 영혼”이라 칭했는데, 한 연주회에서 그는 이 노래를 설명하며 “하늘의, 공중의 새들이 ‘평화, 평화, 평화’라 노래 부른다”고 하였다. 1963년 가을, 카잘스는 케네디 대통령으로부터 “대통령 자유훈장”을 수여하고 싶다는 연락을 받고 같은 해 12월 초에 케네디 대통령을 대면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수상식을 보름여 앞두고 케네디는 불의의 암살을 당했다. ‘평화’를 사랑했던 두 사람 사이에서 평화는 참혹하게 살해당했다.

카잘스는 자신의 조국에 대하여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무려 11세기에 카탈루냐가 이 세상에서 전쟁을 없애기 위한 의회를 소집했다는 사실을 자랑으로 여겼다. 카잘스는 한 인터뷰에서 “높은 수준의 문명이 있었다는 증거로서 이보다 더 좋은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라고 되물었다. 사실 모든 전쟁은 소수의 권력자들에 의해 ‘최종’ 결정되고, 그로 인한 대부분의 희생자들은 지배계급이 아닌 일반 국민들이다. 카잘스는 이미 중세 때 카탈루냐의 헌법에 국민들이 지배자들을 향해 다음과 같이 선언한 구절이 있었음을 상기시킨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당신과 동등합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를 합치면 당신보다 위대합니다.” 이 대목은 현재 대한민국의 헌법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선언과 그대로 일치한다.

극소수의 매파들을 제외하고 전쟁을 원하는 국민은 없다. 그 어떤 최악의 상황도 차라리 전쟁보다는 낫기 때문이다. 극소수의 권력자들이 만들어낸 ‘가짜’ 명분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들의 생명을 잃는다. 전쟁과 분단의 상처가 아직도 생생하게 살아 있는 한반도에서 ‘평화’보다 더 중요한 ‘공통’의 목표는 없다. 전쟁의 가능성이 지속되는 한 한반도에 “높은 수준의 문명”은 없다. 지지부진해진 남북미 대화가 더 절실한 이유이다.

오민석 문학평론가·단국대 교수·영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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