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군회의서 국보위 논의 안 했다."|국회 「광주청문회」신문 내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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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 광주특위는 7일 오전부터 정호용 당시 특전사령관과 윤흥정 전남북 계엄분소장을 출석시켜 증언을 청취.
이날 야당의원들은 6공의 핵심인물 중의 1인인 정씨에 대해 집중적인 공세를 가해 광주사태에 정씨가 깊숙이 관여했다는 것을 밝히려고 안간힘.
특히 야당의원들은 초점이 되고 있는 발포문제와 특전사의 과잉 진압 경위 등을 집중적으로 추궁.

<정호용 씨 증언>
◇김길홍 의원(민정)신문
-많은 야당 의원들이 증인이 광주문제와 관련이 있는 것처럼 주장하고 있는데 어떤 관련이 있나.
『관련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광주에 내가 지휘하고 있는 3개 여단을 파견, 이 3개 여단이 광주 사태 동안 평정 작업을 했다.』
-특전사 예하 부대의 타 부대 배속과 작전통제 및 작전 지휘개념은.
『육본의 명령을 받아 7공수를 2군에 배속시켰고 2군은 광주에 2개 대대, 대전·전주에 각 1개 대대씩을 보냈다. 광주 2개 대대는 전남북 계엄분소장인 전교사 사령관의 지시를 받아 31사단에 재 배속 돼 최초에는 31사단의 작전지휘권 하에서 운영됐다.』
-예하 부대가 타 부대에 배속되면 작전 지휘권이 이양되는가.
『당연하다. 원 소속부대장은 작전을 지휘하거나 이래라 저래라 할 책임도 권한도 없다.』
-당시 서울 중앙의 계엄지휘계통과 광주현지의 지휘계통은.
『중앙은 육본이며 참모총장이 중앙 계엄사령관이다. 전남북 계엄분소는 2군 밑에 있었으며 31, 35사단이 지휘했다. 따라서 전남북에 있어 지휘체제상 분소장이 최고자리이며 다음이 31, 35사단장 그 밑이 배속된 공수부대 책임자들이다.
광주의 경우 35사단과는 관계가 없으므로 31사단이 전적으로 책임이 있으며 정웅 소장이 전남지역을 지휘했다.』
-당시 계엄분소 장은 누구였는가.
『처음에는 윤흥정 이었으며 그 다음은 소준열 이다.』
-발포명령에 증인이 관계돼있다고 줄기차게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질문을 가로채며 큰소리로)
『나는 절대 관여한바 없다. 허무맹랑한 소리다.
그것은 책임을 나에게 전가시킴으로써 유리해지는 사람들의 음모에서 나온 것이다. 줄기차게 그런 음모가 있었음을 이 자리에서 밝힌다.』
-증인은 계엄확대에 찬성했나.
『질서확립을 위해 찬성했다.』
-증인이 계엄확대 및 국보위설치에 대한 연서를 받았다는데.
『계엄령확대는 계엄령 선포와는 차이가 있다. 그런 방법을 한번도 얘기한 적이 없다. 계엄을 확대하자, 말자고 말한 적이 없다. 찬반토론도 전혀 없었다. 더우기 국보위문제는 그 자리에서 아무도 그 같은 얘기를 한 적이 없다.』
-계엄확대 이전에 부대이동 사실이 있는가.
『계엄확대 이전에도 계엄은 있었다. 계엄사령관이 필요하다고 할 때는 언제든지 이동할 수 있었다.』
-계엄확대가 국무회의에서 의결되기 전 병력이동이 위법은 아닌가.
『위법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당시 광주간담회에서 증인이 「싹쓸이」발언을 했다고 당시 31사단장(정웅)이 주장하는데.
『전 교사에 근무하던 대부분의 장병이 광주 등 전남사람들이었는데 실사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 하더라도 「싹쓸이」라는 말을 할 수 있었겠느냐.』
-5월26일 광주비행장에서 3개 공수여단장을 소집해 최종진압 결행명령을 내린 적이 있나. 『없다. 일단 부대를 배속시켜주면 작전권이 없다. 뻔히 알면서도 내가 작전명령을 내렸다고 말하는 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 그럴 수 없다.
나는 26일 밤 10시쯤 광주에 도착했는데 그때는 이미 소준열 장군이 모든 조치를 다 끝내놓은 뒤였다. 처음엔 그 다음날 작전이 있는 줄도 몰랐다. 소 장군을 만나 그 같은 사실을 알고는 「외로운 결심을 하셨다」고 말해줬다. 잘못하면 역사의 죄인이 될 수도 있을텐데 그러나 군인이 임무를 맡고 수행하지 않을 수도 없고 매우 어려운 상황에서 참말로 외로운 결심을 했다고 생각했다.
위에 보고했느냐고 물으니 안 했다고 하더라. 그래서 혼자 책임지겠다고 마음먹는 것도 좋으나 아랫사람으로서 위에 돌아가는 상황을 보고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제서야 소 장군은 「괜히 책임전가 하는 게 아니냐」고 말하면서 이희성 계엄사령관에게 내가 보는 자리에서 전화로 보고를 했다.』
-광주사태 지휘책임과 관련해 31사단장은 5월20일 이후자신의 지휘하에 배속된 공수부대에 대해 작전지휘권을 행사하지 않았다고 했는데.
『전투상보를 보고 나중에 알았다. 정웅 사단장이 공수부대 작전지휘를 면제받은 것은 21일 16시다.』
-그렇다면 18일부터 21일 16시까지 작전지휘 및 사태 진압 조치 책임은 정웅 사단장에 있다는 얘기냐.
『당연하다.』
-21일 16시 이후 공수부대를 누가 작전지휘 했느냐.
『사단의 상급지휘부대인 계엄사령부 분소장이다. 그 당시는 지휘권 인수·인계 전이므로 윤흥정 장군이 맡았다가 22일10시 지휘권이 인수되어 그 이후는 소준열 장군이 맡았다.』
-당시의 향토사단장은 증인이 광주에 상주해 사태 진전에 따라 공수부대를 계속 증파 시켰다고 했는데.
『광주에 상주하지 않았다. 상당한 오해인 것 같다. 그 사람도 군대생활을 해봐 잘 알겠지만 자기 부대라도 이동시킬 때는 상급부대의 명령 없이는 이동을 못 시킨다. 오직 육본 명령에 근거해 할 수 있는 것이다.』
-증인은 평소 군의 정치개입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나.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작년 6·10전후 학생시위 격화 때 정부는 위수령 발동을 구체적으로 검토했는데 증인이 요로에 강경 조치를 만류했다는 것이 사실인가.
『조그만 역할을 한일은 있다.』
-6·29결정에 행사했나.
『영향력 행사한 것은 없으나 6·29정신은 옳은 것이고 노 후보에게 용기를 갖도록 협조했다.』
-향토사단장은 진압을 위한 발포명령을 윤흥정 계엄분소장과 증인이 결정했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윤 장군과 발포에 대해 의논한 일이 없다.』
-증인은 사태진압에 직접 수훈을 세웠기 때문에 훈장을 받았다는 주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지휘관이 탄 훈장은 본인과 큰 관계가 없다. 예하 부대들이 그만한 공로를 세우면 지휘관도 덩달아 그만한 영예를 얻는다.
나도 그런 뜻으로 3개 여단이 광주사태에 참가했기 때문에 참가한 것이 된다.
현시점에서 잘했다고는 할 수 없으나 3개 여단이 수고도 많이 했고 임무를 잘 수행했다는 평가였다.』
-아직도 강경 진압이 먼저인지, 극렬 시위가 문제인지 규명되지 않고 있다.
피해자 측에 비해 계엄군의 입장은 자세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증인은 광주문제의 악화원인을 어떻게 보고있는가.
『과잉진압·지역감정·유언비어 등이 요인을 이루고 있다고 생각한다.
과잉진압은 보는 견지에 따라 해석이 다를 수 있다.
광주·전남지역의 시위진압은 항상 경찰이 했고 군은 경찰이 하다 안될 때 나섰다.
경찰의 진압 방법만 보다가 군인의 진압을 보면 과격진압이라고 보는 것도 당연하다.
과격진압이라고 보고 과격시위가 발생했을 것이고 이것이 악순환을 거쳐 걷잡을 수 없는 과격한 상태가 되었다고 이해하고 있다.』
-지난2월 민화위에서는 광주문제를 민주화운동의 일환으로 규정했고 노태우 대통령도 담화 등을 통해 광주시민의 명예회복과 보상방침 등을 밝힌바 있는데 진정한 치유책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노 대통령이 발표한 내용과 정신에 전적으로 찬성한다. 정부가 그 동안 광주 치유문제에 너무 태만했다. 진작 만족할 만한 보상이 이루어졌어야 하고 오해를 받고 있는 광주 시민의 명예도 회복됐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승화 총장을 연행한 12·12사태를 어떻게 평가하나.
『-2일 밤에는 대구에 있었고 무엇이 일어났는지 몰랐다. 뭔가 궁금했지만 「내일 아침이 되면 알텐데」하고 잠을 잤다.
새벽4시쯤 2군 사령관이 전화로 「서울에서 올라 오라하니 갔다 오시오」라며 총장공관에서 총격전이 나고 한 모양인데 어떻게된 건지 궁금하니 올라가는 대로 전화해 알려달라고 했다. 「어디로 가느냐」고 물으니 「유학성 장군을 만나는 것 같다. 보안사에 가보면 알 것이라고 해 대구를 출발, 최고속도로 달려 아침8시가 좀 지나 보안사에 도착했다.』
그러므로 그날 밤 일어난 것과 관련된 얘기는 전혀 모르며 의논에 개입한 적이 없다. 가족들과 대구에 살았으므로 서울에 올라갈 필요가 없었다. 당시 군대에서는 전반적으로 정 총장에 대해 상당히 의심의 눈초리를 가진 건 사실이다.
총장·계엄사령관 위치에 있으면서 조금이라도 흠이 있으면 앞으로 지휘문제에 큰 문제가 있다는 얘기가 많았고 많은 사람들이 반신반의의 눈초리를 보았으며 나도 그 중의 하나였다.』
-광주사태를 고의적으로 조작해 정권을 잡으려했다는 등의 이야기가 있다. 어찌 생각하나.
『제가 아는 한 12·12사태나 5·17은 정권과 아무 관계가 없다고 본다. 그러한 사태들을 일으켜 정권을 잡겠다는 식의 쿠데타나 그러한 개념 등은 없었던 걸로 생각한다.
12·12나 5·17로 정권을 잡으려 했다면 그 직후 바로 정권을 잡을 일이지 왜 우물우물했겠나. 나는 한번도 정권을 잡아야 한다는 소리를 들은 적도 없고, 의논한 일도 없다.』 <4면으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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