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위주의청산·민주화실천 노력"|신임 강영훈 총리에게 듣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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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우리가 현재 가장 시급하게 해야 될 일은 민주화 추세에 맞는 제도개선과 권위주의에 물들어있는 국민의식을 민주주의 의식으로 바꾸는 일입니다.
6공화국의 2대 총리로 5일 임명된 강영훈 총리서리는 아직 임명 통고를 받지 않은 5일 새벽 자택에서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첫 소감을 묻는 질문에 『아직 총리임명도 받지 않았는데…』라며 『정식 임명된 후 소감을 밝히겠다』고 겸양의 태도를 보이며 이렇게 말했다.
-첫 통고를 언제 누구한테 받았는가.
『아직 통고를 받지 않았다. 어제 밤 홍성철 청와대비서실장으로부터 내일(5일) 아침8시 만나자는 연락만 받았다. 나보고 총리라고 하는데 아직 그렇게 부르지 말아달라. 대통령한테 명장을 받은 후에 소감을 밝히겠다.
-총리로 정식 임명되면 어떤 일부터 착수할 것인가.
『아직 뭐라 이야기하기에는 이르지만…하여튼 민정당 의원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노태우 대통령이 6공화국의 목표로 밝힌 권위주의 청산과 민주화 작업을 철저히 실천하는 일이 가장 시급하다고 본다. 권위주의 청산과 민주화 작업은 동전의 앞 뒤 면과 같은 표리의 관계라 할 수 있다. 권위주의 시대의 법과 제도 등 민주화에 장애 요소였던 것들을 과감하게 청산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작업은 정부만 주도한다고 해서되는 일이 아니다.
-이번 개각은 강한 이미지의 정부를 만드는데 있는 것으로 아는데….
『현시대는 권위주의 시대에서 민주화 시대로 넘어가는 전환기에 처해 있다. 전환기적 시대상황이 전개되면서 국민들의 억눌렸던 다양한 요구가 일시에 분출돼 법질서가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혹자는 공권력이 무너지고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법질서회복은 국가존립과 번영의 첫째가는 조건이다. 흔히들 법질서는 누가 어떻게 하면 되겠지 하고 쉽게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다. 공안질서가 소홀히 되면 민주화와 권위주의 청산이라는 근본이 흔들리게 된다.
-5·16당시 혁명에 반대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군의 정치개입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육사교장으로 있었던 5·16당시 혁명주체세력들이 육사생도들을 가두시위에 동원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으나 거절해 반혁명 제1호로 구속된 적이 있다. 그 때 반대한 것은 육사생도를 정치도구로 이용할 수 없다는 명분에서였다. 그 소신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군은 국가의 간성으로 국방의 임무에만 전념하는 것이 본분이다.
지금도 남북대결 상태는 계속되고 있다. 군이 정치에 간여하면 헌정 질서를 파괴하게되고 이것은 곧 체제파괴를 의미해 공산체제에 대항한다는 대의명분을 흐리게된다. 군의 정치개입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온당치 못한 것이다.
-6공화국에 참여하게된 계기는 어떤 것이었나.
『금년 초 민주화합 추진위원회의 위원으로 활약하면서부터다. 현재 민정당 의원이지만 정치인이라는 생각보다는 나라의 일꾼이라는 생각뿐이다.
강 총리서리는 기자회견 도중 여러 친척들과 친구 등으로부터 축하 전화가 걸려오는지 계속 전화를 받으면서 『아직 결정도 안됐는데…』라며 사양의 뜻을 표시했다.
강 총리서리는 평북 창성 출신으로 일제 때 만주건국대 재학 중 육당 최남선 선생으로부터 역사를 배웠다.
일제 때 학병으로 출전했다가 귀국한 그는 공산당의 발호를 피해 월남, 군사 영어학교에 들어가 군인의 길에 들어섰으며 53년 국방차관으로 2주일간 근무 후 제2사단장으로 나갔으며 이기붕 씨의 국방장관 시절 제3국장으로 이씨의 총애를 받았다고 한다.
이런 인연 때문에 4·19때 이씨가 6군단장으로 있던 강 총리서리에게 피신처를 구하려 했던 일은 유명한 일화.
강 총리서리는 『이씨가 6군단으로 찾아왔으나 원주의 작전회의 참석 때문에 이씨를 못 만났고 그 이튿날 서울로 돌아간 이씨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었다』면서 자신이 이씨를 일부러 피했다는 설은 오해라고 해명했다.
강 총리서리는 5·16때 육사교장으로 육사생도의 5·16지지 데모 요청에 반대해 혁명세력에 의해 구속됐으며 이로 인해 62년 육군중장으로 예편됐다. 당시 생도들은 군의 정치개입을 반대한 그에 대해 아직도 호감을 갖고 있다고 한다.
예편 후 바로 도미유학, 남가주 대학에서 「소련과 중국에 있어서 핵 전략 무기의 발전과 억제이론의 관련성」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후 70년 워싱턴에서 한국문제연구소를 개설해 연구활동을 하다가 15년만의 타의에 의한 외국생활을 청산, 77년에 처음으로 귀국해 외국어대학원장에 취임했다.
78년 한때 주미대사관에 같이 근무했던 박동진 외무장관 요청으로 외무부외교안보연구원장에 취임했고 81년 주영대사, 84년 주 로마교황청대사에 임명되어 외교관으로 전신했다가 지난 4·26총선거 때 민정당 전국구 4번으로 정계에 진출했다.
강 총리서리는 육사교장 때 『물에 빠지는 것이 위험하다고 아이들을 아예 물가에 보내지 않는 것이 과연 언제까지 가능할 것인가』라는 이유로 육사교육과정에 공산주의 비판교육을 넣을 것을 주장하는 등 일찍부터 지공교육을 제창하기도 했다. 문무겸전의 강 총리서리는 등산이 취미. 부인 김효수 여사(61)와의 사이에 2남1녀. <이규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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