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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현기의 시시각각

김여정의 각본, 트럼프의 무원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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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김현기 기자 중앙일보 도쿄 총국장 兼 순회특파원
김현기 워싱턴 총국장

김현기 워싱턴 총국장

지난 5월 9일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의 2차 방북 당시 조그만 돌발상황.

능숙한 북한 외교 중심에 김여정 존재 #미국은 북핵을 중국에 연동, 혼선 자초

폼페이오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의 면담 도중 자료 하나를 김정은에게 건넸다. 내용은 극비. 김정은은 배석한 김영철 노동당 부위원장에게 넘겼다. 해프닝은 접견이 끝난 뒤. 접견장을 나서는 순간 밖에 대기하고 있던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이 쏜살같이 달려왔다. 그러곤 김영철이 건네받은 자료를 낚아챘다. 접견장이 투명유리로 돼 있어 김여정이 내부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보고 있었던 것이다. 김영철은 아무런 ‘반항’을 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을 것이다. 당시 상황은 미국 측 수행원 모두가 목격, 두고두고 화제가 됐다.

폼페이오의 4차 방북이 전격 취소되면서 워싱턴에선 한국·미국·중국을 들었다 놨다 하는 북한 외교의 중심에 김여정이 있는 것 아니냐는 의심을 보내고 있다. 지난 6월 싱가포르 정상회담 전후부터 김정은을 집중 분석한 결과 통이 크고 머리 회전이 빠른 건 인정하지만 표정 등으로 ‘읽히는’ 인물이란 내부 판단을 했다 한다. 협상 대표인 김영철은 거의 말이 안 통하는 독불장군이면서 김정은에게 전략·전술을 적극 제언하는 스타일도, 그럴 만한 위상도 아니란 평가다. 결국 김여정의 관여 아래 일련의 모든 각본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인데, 일본의 정보기관도 비슷한 분석을 내놓았다 한다.

문제는 미국으로선 꽉 막혀 있는, 김여정의 의도대로 돌아가고 있는 현 상황을 타개할 뾰족한 수가 없다는 것이다. 특히 행정부 내 실무 관료들과 트럼프의 ‘이해의 격차’가 갈수록 심해지는 양상이다.

폼페이오 4차 방북 취소를 둘러싼 혼선이 그랬다. 23일 “다음주에 간다”고 발표해 놓곤 하루 만에 전격 취소했다. 북한으로부터 당일 ‘적대적’ 내용의 비밀 편지를 받았기 때문이란 보도도 있지만 편지 한 장에 방북을 취소하는 자체가 무원칙과 주먹구구식 대응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게다가 방북 취소를 공표하면서 “미·중 간 무역 문제가 해결된 뒤 폼페이오가 방북할 것”이라고 했다. 스스로 “북핵 문제는 미·중 무역 문제의 후순위”로 규정했다. 중국과의 무역 전쟁이 조기에 끝날 것이라 보는 이는 없다. 그런데도 굳이 중국 문제를 끌어들였다. 북핵 문제를 타결하려는 생각보다 11월 중간선거에 미·중 무역갈등을 부각해 ‘중국에 맞서 싸우는 대통령’의 이미지를 부각하는 쪽으로 튼 것이다. 그게 득표에 더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관료들은 ‘정책’에 맞춰 일을 진행하고, 트럼프 대통령은 ‘정치와 직감’에 따라 행동한다. 서로 따로 논다.

당분간 북·미 관계에 돌파구는 없어 보인다. 시진핑은 트럼프의 협박에 아랑곳하지 않고 북·중 밀월 굳히기에 들어갈 것이다. 북핵 문제가 복잡한 고차방정식, 아니 트럼프 발 삼류 리얼리티쇼의 구도가 돼 버렸다. 우려했던 상황이 너무 빨리 왔다. 다음달 말 뉴욕에서 열리는 유엔총회도 김정은 참석 가능성이 거의 사라졌다.

이런 와중에 우리만 일방적으로 북한과의 관계개선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기도 모호해졌다. 게다가 미국은 “‘북한의 1년 내 비핵화’는 남북 정상회담에서 합의한 것”이라며 그 약속을 전달한 한국에 노골적으로 책임을 돌리려는 판이다. 이럴 때는 ‘구체적 비핵화 조치 전까지는 강력한 제재 유지’라는 기본으로 돌아가는 게 옳다. 비핵화와 평화는 함께 가야 한다. 비핵화 없는 한반도 평화는 없다. ‘대북제재’ 위반 논란이 있는 남북연락사무소 개소를 서둘러 미국과의 불필요한 마찰을 키울 필요가 없다. 북한이, 김여정이 원하고 의도하는 그곳으로 지금 우리가 달려갈 이유가 없다.

김현기 워싱턴 총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