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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정재의 시시각각

장하성, 통계 갖고 장난 말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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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이정재
이정재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문재인 정부는 통계청의 독립성에 개입하거나 간섭할 생각이 전혀 없다”고 청와대 대변인이 이틀 전 말했다. ‘통계청 독립’을 청와대가 입에 올리는 기막힌 현실도 말이 안 되지만, 그 말을 믿을 수 없다는 게 더 황당하다. 소득 통계 지표가 나빠져 소득주도 성장 폐기 논란이 불거진 상황에, 하필 ‘코드 인사’를 새 청장으로 임명했으며, 물러나는 황수경 통계청장이 퇴임식 내내 울면서 “통계가 정치적 도구가 돼선 안 된다” “제가 그렇게 (윗선의) 말을 잘 들었던 편은 아니었다”고 한 것들은 그저 심증일 뿐이다. 더 확실한 불신의 증거가 살아 있다. 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이다.

통계청 “부적절하다”는데 #1년 뒤 또 아전인수 해석

장 실장은 고려대 교수 시절이던 지난해 5월 17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글 하나를 올렸다. 정책실장에 임명되기 나흘 전이다. 기업과 고소득층이 더 많이 가져가는 바람에 가계소득이 경제가 성장한 만큼 늘어나지 않는다는 취지의 글이다. ‘1990년부터 2016년까지 26년간 국내총생산(GDP)이 260% 늘어날 동안 기업 총소득은 358%, 가계 총소득은 186% 늘어났다’며 한국은행 통계를 인용했다. 여기까지는 괜찮다. 그런데 엉뚱하게 여기에 ‘가계 평균 소득은 90% 늘어나는 데 그쳤다’며 통계청 가계동향조사 통계를 끼워 넣었다. 황수경 청장의 경질 논란을 부른 바로 그 ‘가계동향조사’다. 그러고는 가계 총소득(186%)보다 가계 평균소득(90%)이 훨씬 적게 늘어난 것은 소득 불평등이 확대됐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이 글을 경향신문이 다음날 소개했다.

통계청은 즉각 반박 설명 자료를 냈다. 첫째, 두 통계는 작성 범위와 개념이 달라 직접 비교하는 게 부적절하며 둘째, 두 수치의 차이를 가계소득 계층 간 불평등 확대의 근거로 사용하는 것은 맞지 않는다고 밝혔다. 통계청은 가구원 수가 90년 평균 3.7명에서 2015년 2.5명으로 크게 줄어 가계 평균소득 증가율을 둔화시키고 있다고 적시했다. 예컨대 가구당 3.7명이 벌던 것을 2.5명이 벌면 한 사람당 똑같이 100원씩 벌어도 가구당 소득은 370원에서 250원으로 떨어진다. 통계청은 가구원 수가 3.7명으로 26년 동안 변하지 않았다면 국민총소득 증가율과 가계 평균소득 증가율은 똑같았을 것이란 설명도 덧붙였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통계청은 장하성 교수가 정책실장이 된 후 이 설명 자료를 폐기하라는 압박에 시달렸다. H행정관이 통계청 간부들에게 “학자가 통계를 잘못 인용할 수도 있는 것 아니냐”며 삭제를 요구했다고 한다. 통계청 관계자는 “당시 통계청을 쥐잡 듯 잡았다”며 “황수경 청장도 꽤 시달렸을 것”이라고 말했다. “통계의 중립·독립성에 대해서는 황고집”으로 불렸던 황수경 경질의 또 다른 이유일 수 있다.

여기까지도 백번 양보해 그럴 수 있다고 치자. 장 실장은 1년여가 지났지만 ‘통계 장난’을 그만두지 않았다. 지난 26일 청와대 기자간담회에서 “2000년부터 지난해까지 가계 총소득은 69.6% 늘었지만 가계 평균소득은 31.8% 늘어나는 데 그쳤다”고 주장했다. 기간을 26년에서 17년으로 줄였을 뿐 똑같은 ‘통계 왜곡’을 되풀이한 것이다. 1년 전보다 죄질이 더 나쁘다. 당시엔 몰라서 그랬을 수도 있다. 이번엔 뻔히 알면서 했다. 학자 신분도 아니다. 이 정부의 경제 철학을 총괄하는 자리다. 그래 놓고 청와대가 ‘통계 독립’ 운운하니 누가 믿겠나. 청와대는 얼마 전에도 경제 통계 그래프를 왜곡해 물의를 빚었다. “단순 실수”였다고 해명했지만, 이쯤 되면 그 말도 믿기 어렵다.

코드 인사 논란을 빚은 신임 강신욱 통계청장은 취임식에서 “외풍에 흔들리지 않도록 든든한 바람막이가 되겠다”고 했다. 그러려면 그가 첫 번째 할 일은 1년 전 설명 자료가 폐기되지 않도록 지키는 것이다. 통계청 홈페이지에서 이 설명 자료가 폐기되는 날, 한국의 통계 행정이 사망선고를 받은 날이 될 것이다.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