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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나무] 동심 새록새록 … '엄마 무릎학교' 의 교과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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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이문구 동시집>
가득가득 한가득
최혜영 그림, 랜덤하우스중앙, 130쪽, 8500원

나무도 나무나름 쓸모도 쓰기나름
노성빈 그림, 랜덤하우스중앙, 140쪽, 8500원

풀익는 냄새 봄익는 냄새
사석원 그림, 랜덤하우스중앙, 141쪽, 8500원

좋은 동시를 한 편 읽고 나면 아이가 된 듯한 느낌이 든다. 좋은 동시를 여러 편 모아 놓은 동시집을 읽다 보면 단지 그런 느낌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아이가 되고 만다. 아이의 눈으로 본 세상을 아이의 입으로 말하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시에서 가만가만 울려나와 어느새 내 안의 목소리로 가득 차오른다. 그 목소리의 낭랑한 울림이 이미 다 커 버려 어른이 된 지 오래인 나를 문득 어린 시절로 되돌리는 것이다.

"산 너머 저쪽엔/별똥이 많겠지/밤마다 서너 개씩/떨어졌으니//산 너머 저쪽엔/바다가 있겠지/여름내 은하수가/흘러갔으니" ('산 너머 저쪽') 다시 아이가 되고 싶을 때마다 나는 이문구 동시집을 펼쳐서 이 짤막한 동시를 읽는다. 이 시가 실린 고(故) 이문구 선생의 첫 동시집 '개구쟁이 산복이'가 나온 지 벌써 20여 년이 흘렀다. 당시만 해도 그는 '관촌수필'이나 '우리 동네' 등을 통해 소설가로 확고히 자리잡은 터여서 그냥 여기(餘技)로 동시집을 한 권 펴냈으려니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리고 동시집에 자주 등장하는 작가의 아들과 딸, 산복이와 자숙이를 위한 선물이겠거니 여기기도 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이문구의 동시는 세상에 널리 퍼졌다. 그의 동시를 읽고서 다시 아이가 된 체험을 한 어른들이 자신의 무릎에 아이들을 앉히고는 도란도란 읽어 주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어느덧 세월이 흘러 엄마 아빠의 '무릎학교'에서 그의 동시를 읽고 자란 아이들이 어른이 돼 다시 자신의 아이들을 무릎에 앉힐 차례가 된 것이다. 무릇 좋은 아동문학 작품은 이런 과정을 거쳐 생명력을 얻는 것이리라.

"지나가시는 어른 보고/"아저씨."/하면/아저씨는 가시다 말고/돌아보셔요/내가 한 번 웃으면/아저씨도 한 번/웃으셔요"('어떤 아저씨') 이처럼 그의 동시는 한 동네 아저씨와 아이가 주고 받는 웃음처럼 친근하고 다정다감하다. 혼자 놀다 심심한 아이가 지나가는 아저씨에게 그냥 참견을 해 보듯 주위의 온갖 사물들에게 말을 걸기 때문이다. 천진한 아이가 말을 걸면 이 세상의 사물들 중 한 식구나 이웃이 아닌 게 하나도 없다.

빨랫줄에 앉아 쉴 새 없이 얘기하는 '더부살이 제비'나 "일찍부터/집 앞에서 들락날락"하는 까치는 한식구이고, "봄볕에 그을려/가무잡잡"한 산복이에게 "아찌야"하고 부르는 까마귀나 몽촌 토성에 사는 어린 꿩 '꺼병이'는 누구보다도 다정한 이웃이다.

이번에 완간된 '이문구 전집'의 말미에 가장 볕바르고 따뜻한 자리를 차지한 세 권의 동시집 '가득가득 한가득' '나무도 나무 나름 쓸모도 쓰기 나름' '풀 익는 냄새 봄 익는 냄새'를 읽으면서 시인 백석과 윤동주를 떠올렸다. 겨레의 삶을 푸근하게 드러냈던 두 시인의 동시들은 한참 잊혀져 있다 최근 아이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그처럼 이문구의 동시들도 세월이 흐른 뒤에도 아이들의 무릎에 자주 놓이기를 바란다.

신형건(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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