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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정 재판, 루저는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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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문병주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문병주 사회팀 차장

문병주 사회팀 차장

예상은 했었다. 2주 연속 주말 거리에서 “안희정 유죄다” “사법부도 유죄다” 구호가 들렸다.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김지은씨에 대한 성폭행 혐의가 1심 재판에서 무죄 판결이 난 데 대한 분노의 표출이었다.

거리뿐 아니다. 굴지의 인터넷 포털 사이트 뉴스 메인 화면에는 판결을 비판하고 비난하는 기사들이 전진 배치됐다.

다시 재판부가 읽어내려간 판결 내용을 들여다봤다. 재판부가 전달하려는 메시지는 명확했다. 핵심은 안 전 지사를 처벌에 이르게 할 정도로 김지은씨 측의 주장이 신빙성과 일관성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검찰이 항소했기 때문에 이 부분에 대한 판단은 서울고법에서 다시 다뤄지게 된다.

1심 재판부는 말미에 더 근본적인 문제까지 제기했다. ‘현 법률 체계에서 안 전 지사에게 유죄를 내릴 근거가 없다’는 것이었다. ‘No Means No Rule’ ‘Yes Means Yes Rule’이라는 영문까지 활용했다. 성관계 시 명확한 거부의 표시나 명확한 찬성의 표시가 있어야 한다는 처벌의 기준이 우리 법률체계에는 없다는 것이다.

반론도 있다. 형법 제303조(업무상 위력 등에 의한 간음) 1항은 ‘업무, 고용 기타 관계로 인하여 자기의 보호 또는 감독을 받는 사람에 대하여 위계 또는 위력으로써 간음한 자는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15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고 돼 있다. 이 조항을 더 적극적으로 해석했다면 유죄를 내릴 수 있었다는 주장이다. 항의집회에서 구호를 외치는 이들도 이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우리와 비슷한 법체계를 가진 독일은 2016년에 ‘No Means No Rule’을 명문화했다. 최근에는 스웨덴이 이보다 더 성적 자기결정권을 강조하는 ‘Yes Means Yes Rule’을 입법화했다.

현재 국회에서는 여성 의원들이 중심이 돼 ‘No Means No Rule’을 법에 명시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있다. 의원들은 우리 형사법에 1심 재판부가 지적한 부분이 법률에 명문화된다면 수많은 성폭행 판결에서 결과가 달라질 것이라는 생각을 공유하고 있을 것이다.

김지은씨의 안 전 지시에 대한 ‘미투(#MeeToo)’는 안 전 지사가 최종적으로 유죄를 선고받느냐와 상관없이 큰 사회적 의미를 갖는다. 성문화와 성인식의 개선은 물론이고 전 사회적으로 합리적이고 건설적 논의를 촉발했기 때문이다.

이번 재판의 승자를 안 전 지사라고 치부해서는 안 된다. 재판 결과를 두고 자극적인 이야기와 구호만 계속된다면 모두가 루저(Loser)가 돼 버릴 수 있다. “비동의 간음죄 입법하라”는 식의 건설적 구호를 재판 항의 집회에서 많이 접했으면 하는 이유다.

문병주 사회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