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담사 주지의 자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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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불가에서는 옷깃만 스쳐도 그것을 인연 (인연)이라 했다. 인간은 숙명적으로 인연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으며 모든 사물은 인연에 의해 생멸 한다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은둔의 고행 길에 들어선 전두환·이순자씨 부부와 이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해준 백담사주지 김도후 스님과의 만남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다시 한번 일깨워주는 기묘한 인연이었다.
전두환씨가 권력의 정상에 올라 숙정의 칼을 휘둘렀던 5공화국 초기, 김도후 스님은 그 칼날에 잘렸던 피해자의 한사람.
김 스님은 불교계 인사가 대량 숙정 됐던 이른바 「10·27법난」 당시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간부를 지냈던 불교계의 중진. 그러나 그는 숙정 대상으로 몰려 하루아침에 직책을 박탈당하고 통한의 길을 걷기도 했다.
그로부터 8년후. 가해자와 피해자가 백담사 대웅전 부처님 앞에서 만난 것이다.
절대권력을 휘둘렀던 가해자와 칼날 앞에 몸을 떨었던 피해자와의 만남.
그것은 인간은 모두 인연의 끈에 묶여있으며 천하를 주물렀던 독재자라 할지라도 부처님 손바닥을 벗어 날수 없다는 불교의 심오한 진리를 되씹게 해주고있다.
매서운 칼바람이 몰아치는 초겨울, 「삭풍의 광야」를 거쳐 산사로 찾아든 가해자를 보는 피해자의 심정은 어떤 것이었을까. 스님인들 인간적인 증오의 감정이 없었을까.
그러나 김스님은 전씨 부부가 쉬어갈 따뜻한 방을 내주었고 깊은 가슴으로 그들을 포옹했다. 「자비」앞에 「적」이 있을 수 없다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른 셈이다.
「자비무적」 의 불심이 전씨를 감동시킨 것일까. 전씨는 도후 스님에게 『담배1개피 피우는 것도 고행에 무거운 짐이 되는 것 같다』고 심정을 토로하고 담배까지 끊었다는 소식이다.
전씨 부부는 언젠가는 백담사를 떠나야 한다. 은둔처가 노출된 이상 등산객을 가장한 시위대의 습격이 잦아질 것이고 이는 신변의 위협은 물론 과거의 피해자에게 다시 한번 피해를 주는 결과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씨 부부가 떠난다고 해서 또 다른 인연의 굴레를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이제시작인 그의 여정에서 그 어떤 인연이 다시 맺어질지 하는 물음이 독경소리에 담기는 듯하다. <백담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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