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평 객사서 되씹는 〃권력무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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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1천2백41년의 역사를 지닌 내설악의 백담사가 고찰(古刹)의 정취를 잃고 정치적 뉴스의 초점으로 한차례 시달림을 받고 있다. 지난 23일 전두환-이순자씨 부부가 경내 객사에 들어 은둔생활에 들어가면서부터 백담사는 일반인의 출입이 막힌 삼엄한 경찰경비의 통제구역으로 변했다. 전씨부부의 백담사 은둔이 허문도씨의 발상이란 사실이 알려지고 은둔 3일만인 25일 전씨부부 기거지인 객사방이 공개, 은둔생활의 궁금증이 풀린데 이어 이달말 옮겨질 전씨부부의 은둔지가 어디일까가 또다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백담사 은둔 전씨부부 근황>
2평짜리 객사에서 은둔3일째 밤을 보낸 전씨부부. 『은둔이 아니고 정권과욕으로 저지른 과오에 대한 참회의 고행』이라고 전해지는 그의 말에서 권력의 무상함과 역사의 교훈을 새삼 느끼게 한다.
그러나 은둔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노태우대통령의 전씨에 대한용서·관용 등 특별담화와 함께 곧 전씨부부가 거처를 다시 옮길 것으로 보이는 가운데 그가 밝힌대로 국민의 뜻이라면 어떤 단죄도 받겠다는 말처럼 그에게 놓인 여정은 내설악계곡에 쌓인 낙엽만큼이나 깊게, 그리고 헤아리기 어렵기만 하다.
○…전씨부부의 백담사은둔이 허문도씨의 발상이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현지 경호경찰은 물론 주민들까지 청문회 증인으로 나와 『모른다로 시치미를 떼던 바로 그 사람이 아니냐』며 언짢아하는 표정들.
허씨는 지난2O일 불교계인사들과 만나 월정사와 백담사 두 곳을 놓고 은둔지를 논의하다 보안상 적지인 백담사로 의견을 모았다는 후문.
이에 21일 경호팀이 현장을 답사, 경내를 청소하고 임시 화장실을 객사 앞에 마련하는 등 준비를 끝내고 거처 뒤뜰에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소형소화기 5대까지 비치한 뒤 23일 오후3시20분 전씨부부를 맞이했다고.
허씨의 이 같은 발상은 전씨부부가 사찰에 은둔함으로써 참회와 고행의 모습을 국민들에게 알릴 수 있다고 믿었던 것 같다는 것이 일부의 시각.
그러나 사찰은둔이 이런 점에서 이뤄졌다면 오히려 국민의 반감만 살뿐이 아니겠느냐는 인근 용대리의 한 주민은 『과연 전씨부부가 어떻게 참회하느냐가 국민심판의 저울대가 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전씨가 23일 오후 백담사에 도착하기 20여분전에 안현태전청와대경호실장이 먼저와 현장을 최종 점검한 후 경호요원들이 근무위치에 배치되면서 외부인 출입이 금지되자 한적하던 산사의 분위기는 금세 살벌해졌다.
○…전씨부부는 청와대와 연희동에서 아쉬숨 없는 호화생활을 해온데 비할 때 방안에 줄을 매고 손수 빨래까지 널어 말리는 등 한마디로 인생무상의 모습.
전씨는 이런 탓인지 은둔 이틀째부터 밥을 비우지 못하고 있다고.
사찰측은 이에 따라 지금까지 밥상에 올렸던 반찬외에 상치무침·배추생절이·더덕·두부등 네 가지를 밥상에 올렸으나 점심때도 또다시 밥을 다 비우지 못해 안절부절.
이런 가운데 25일 오후5시쯤 속초에서 4O대여자가 비닐봉지에 담은 산오징어회와 플래스틱통에 담은 창란젓 등을 승용차에 싣고 절로 바로 들어가려다 보도진들에게 발견되자 죄지은 듯 놀라는 모습.
김주지는 『속초에 사는 이신도에게 부엌일을 좀 도와달라고 연락한 것이 순박한 마음에 생선회와 반찬거리를 갖고 와 버릴 수 없어 경호원들에게 나눠주었다』고 해명.
전씨는 24일 오전 도착직후 사찰경내를 돌아볼 때 웃는 모습이 담긴 신문을 본뒤 심기가 불편해하고 있다고 한 측근이 전언.
이측근은 『전씨 자신은 진정한 참회의 고행을 하고 있는데 웃는 장면이 신문에 나가면 이를 본 국민들이 어떻게 생각하겠느냐며 불만스러워했다』는 것.
○…전씨부부가 은둔의 여장을 푼 뒤부터 사찰측은 김도후주지 등 10여명의 식구들이 「귀빈」(?) 뒷바라지에 매달리느라 분주한 모습.
특히 사찰측은 전씨부부의 입맛을 돋워주기 위해 30여㎞나 떨어진 원통시장을 드나들며 도토리묵·두부·푸성귀 등을 사다 반찬을 만드느라 분주.
김주지는 『사찰이라 고기음식은 만들 수 없어 채식으로만 식단을 꾸미느라고 애를 먹고있다』 며 『절 풍습을 지키려다 귀한 손님대접이 소홀한 게 아닌가 미안한 생각이 든다』 고 말했다.
스님들은 요 며칠사이 전씨의 사찰은둔에 대해 조계종과 승가회·일부 국민들 사이에서 강한 반발이 일자 크게 당혹스러워 하고있다.
한 스님은 『10·27법난의 최고당사자가 절간에 머무른다는 것은 모순인 것이 분명하다』 며 『그러나 전씨부부가 참회의 도량으로 선택한 것이므로 마땅히 포용해줘야 하지 않겠느냐』고 동정론을 펴기도.
○…지난 3일동안 전씨를 방문한 사람은 서의현총무원장과 김혜법 신흥사주지 등 6∼7명의 스님들만 인사차 다녀갔을 뿐 일반인은 전혀 없다.
전씨는 특히 주말 등을 이용, 군장성이 절을 찾아오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경호측근들에게 당부한 것으로 전해졌다.
전씨의 하루일과인 독서를 제외하면 스님늘과 만날 때 인생여담과 불교얘기 등을 나누며 소일.
25일오전 전씨와 만났던 서울방배동 자비사주지 박삼중스님은 전씨와의 환담을 통해 『권좌에서 물러난 자연인으로 인생무상을 절실히 느끼며 참회하는 것 같더라』고 말했다.
이순자씨는 도착 후부터 스님들이 인사를 해도 가볍게 웃으며 목례를 보낼 뿐 전혀 말이 없다고 김주지스님이 전했다.
전씨부부는 요즘 식사 때나 방안에서 쉬면서 똑같이 두툼한 스웨터에 회색바지를 입고있으며 전씨의 스웨트는 밤색, 이씨는 쥐색.
전씨가 은둔한 백담사에는 전국 각지로부터 전씨를 동정하는 전보가 10여통 배달됐으며 안현태전경호실장에게도 건강을 비는 위로전보1통이 배달됐다고 안씨가 소개.
○…26일 오전9시쯤 경호원2명이 백담사에서 트렁크1개·가죽가방1개·빨랫감이 든 비닐봉지 1개를 들고 나와 경호차인 로열프린스 승용차에 싣고 원통쪽으로 사라져 눈길.
백담사앞에서 차에 짐을 싣기 전 『어디로 무엇을 가지고 가느냐』는 질문에 경호원들은 『빨랫감일 뿐 아무 것도 아니다. 세탁소에 빨래를 맡기고 목욕도 할겸 원통쪽으로 간다』 며 더 이상의 대답을 회피.
그러나 트렁크와 가죽가방 등을 볼 때 모두가 빨랫감만은 아닌 것이 분명했으며 경호원 차는 인제군 용대2리 삼거리에서 취재차량들을 따돌리고 원통폭으로 사라졌다.
○…전두환씨는 26일 오전7시쯤 아침식사후 김도후주지스님, 도형봉정암주지스님 등과 함께 지난23일 저녁식사 이후 처음으로 절에서 제공한 설록차를 들며 환담.
이 고찰을 지키는 김주지스님이 전씨부부가 은둔한데 대해 이렇게 말했다. 『절은 산과 물이 있어 자주 찾고 싶은 고향 같은 곳이지만 어쩌면 참회를 하지 않고서는 못 견디게 괴로운 한 인간을 위해 선악을 가리지 않고 맡는 곳입니다.』 【백담사=권혁룡·제정갑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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