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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회 모임에 일부언론인도 참석|국회 문공위 청문회 지상중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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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국회 문공위 언론청문회가 23일로 끝난다.
이에 앞서 22일 열린 언론통폐합 진상규명을 위한 국회 문공위의 이틀째 청문회는 피해자와 입안자 등 증인 13명으로부터 증언 청취 및 증인들간의 대질신문을 벌인 끝에 23일 새벽4시까지 진행됐다.
다음은 22 일의 신문내용 요지.

<한용원(전 보안사 정보처장)·이병찬(검열단장)·이룡린(전 보안사정보2과장)씨 증언>
◇박관용 의원(민주) 신문
-언론 통폐합 서류를 이광표 문공 장관이 보안사로 가져온 상황은.
▲한용원씨= 80년11월10일 이광표 장관이 오후 2시쯤 결재 서류를 가져와 오후 4시쯤 강원도에서 돌아온 노 사령관에게 안내했다. 이 장관은 대통령에게 결재과정에서 보안사 협조 받으라고 지시해왔다고 했다.
-노 사령관은 뭐라고 하든가.
▲한씨=노 사령관이 안 하기로 했는데 정책을 왜 이랬다 저랬다 하느냐. 당신은 소신이 전혀 없느냐. 소신이 없다면 내가 대통령에게 재고를 건의하겠다고 말했다.
-이 장관은 뭐라고 답변했나.
▲한씨=보안사에서 포기각서만 갖다주면 책임지고 하겠다고 했다.
-노 사령관 대답은.
▲한씨=문공부에서 결재를 받았으면 당신들이 해야지 악역을 왜 우리에게 떠맡기느냐고 화를 냈다.
-바로 그 서류를 집행했는가.
▲한씨=그렇다. 이 장관이 나간 후 노 사령관이 나와 대공처장을 방으로 들어오라고 한 후 군인이라는 것이 하고 싶은 일만하고 하기 싫은 일은 안 하는 것이 아니다. 대통령께서 많이 생각해서 한 일일 테니 양부서가 협조 처리하라고 했다. 대공 처와 협의를 하라고 노 사령관이 지시해 대공처장 방으로 갔더니 이상재 보좌관이 미리 와 있었다.
-세 사람이 언론사의 포기각서를 받기로 결정했나.
▲한씨=그렇다. 이 보좌관이 이미 포기각서 양식을 준비해 왔었다. 대공처장과 논의, 언론사 사장을 보안사로 모셔가 포기각서를 받는 장소 등에 대해 얘기를 나누고 내가 일이 바쁘다며 일을 벌인 사람이 마무리하도록 하자고 의견을 내 결국 이 보좌관이 맡게된 것이다.
◇이철 의원(무소속) 신문
-이병찬씨는 보도검열단장으로 일하며 누구의 지침을 받았냐.
▲이씨=장군인 보도처장으로부터 기본지침을 받았고 이상재씨가 3월에 검열단에 온 후는 상황변화에 따른 그때 그때의 지시는 이씨 지시를 받았다. 보안사령부에서 지침을 받아와 검열 단에 전달한 것이다.
-5·17 계엄 확대 이후 19 일에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결재 사인한 「계엄포고령 10 호에 의한 보도통제 지침」서류가 나왔을 것이다(이 의원이 서류를 확인해보라며 이병찬씨에게 전달.)
▲이병찬씨=그런 내용의 문서를 본일 있다.
-당시 이것을 계엄사의 문서로 생각했나.
▲이씨=그렇다.
-이 문서를 보니 보안사령관이 계엄사령관의 귀하까지 찬탈한 상태라고 보이지 않는가.
▲이씨=이걸 보니까 그런 것 같다.
-보도 검열 단이 보안사의 전두환과 이상재 통제하에서 보도검열을 시행한 증거가 아닌가.
▲이씨=그렇다.
-한용원씨는 노태우 보안사령관에게 결제 받은 서류의 두께를 기억하나.
▲한용원씨=정확히 기억나지 않으나 3∼4페이지 정도 됐던 것 같다.
-한국일보에 보도된 건전 언론 육성방안 서류를 본일 있나(서류를 한씨에게 전달) .
▲한씨=유사했던 것 같다.
◇이상회 의원(민주) 신문
-이광표씨는 몇 차례에 걸쳐 1도1사 원칙 밖에 없었다고 증언했고 허문도씨도 마찬가지다. 전재오씨는 지방사의 경우 통폐합내용을 전통지시 한 것 같다고 했다. 한씨는 언론통폐합 결재서류를 끝까지 읽어보았나.
▲한씨=눈으로 훑어봤다.
-1도1사 원칙만 있는지, 구체적 내용까지 있는지 기억하는가.
▲한씨=분명히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손주환 의원(민정) 신문
-지방사 통폐합을 이상재씨가 지휘했다는 말이냐.
▲한씨=예.
-정보처장과 노 사령관의 결재를 받았나.
▲한씨=받은 일없다.
-1도1사안을 독자적으로 집행했다는 건가.
▲한씨=그런 가능성을 얘기했다.
-한국일보에 보도된 건 이상재씨가 대책 반에서 만든 건가.
▲한씨=당시 대책 반에 나온 문공부직원이 초안을 잡아 보안사 필경 사가 다시 썼다.
-언제쯤인가.
▲한씨=7월말, 8월초쯤이다.
-실질적 책임자는.
▲한씨=당시 추정키로는 허문도·이상재씨다.
◇박석무 의원(평민) 신문
-노 사령관은 4시쯤 귀경 했는데 당시 동아일보를 담당한 윤승오 증인은 3∼4시쯤 삐삐로 사람 소재파악 지시를 받았다고 했다. 증인이 김충우 보좌관과 함께 연락을 시작한 것은.
▲한씨=5시쯤이다.
-노 사령관 결재 전에 이미 다른 채널로 연락이 되고 있었다는 것 아니냐.
▲한씨=언론 대책 반에서 연락이 왔을 거다. 이미 6시쯤 모시고 오라는 연락이 돼 있었던 걸로 안다.
-언론 대책반은 그 위에 상의할 곳이 있었을 텐데. 허문도씨 아닌가.
▲한씨=그렇게 추정한다.
-사주를 부르러 보낸 사람은.
▲한씨=수사관이 13명, 방이 13개였으니 13명이 나갔다고 봐야한다.
-태평회는 정관도 없는 검열단원 친목단체가 틀림없나.
▲이병찬씨=그렇다.
-검열단원 아닌 사람도 있다는데.
▲이씨=언론 대책반에 있던 사람들도 있다.
-이병찬 증인은 태평회를 순수 친목단체로 만들려고 했으나 대책 반이 들어와 이상재씨를 만나려고 언론인도 몰려드는 통에 문제가 된 것 아니냐.
▲이씨=어떻게 내가 하고싶은 얘기를 그대로 해주나.
-국회 의원 중 관계한 사람은.
▲이씨=심명보씨가 있다.
-사실상 이상재 후원회가 된 것 아니냐.
▲이씨=바로 그거다.
-심명보 한국일보 편집국장 이외에 이상재씨 방에 드나들었던 언론인은.
▲이병찬씨=검열 초창기에 보도협조에 잘못된 점이 있어 조선일보 정치부장 최병렬씨를 한번 부른 적이 있다.
◇손주환 의원(민정) 신문
-노태우 보안사령관이 이광표 장관에게 대통령 결재에 대해 화를 많이 냈다는데 이 장관의 표정은 어떠했나.
▲한용원씨=옆에서 보니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고 있었다.
-당시 권력핵심이 보안사에서 청와대로 옮겨간 것 아닌가
▲한씨=그렇다.
◇박관용 의원(민주) 신문
-(이룡린씨에게)한씨의 증언이 대체로 사실이라고 생각하는가.
▲이씨=그렇다.

<허문도(당시 중정부장 서리 비서실장) 김충립(당시특전사 파견보안사 소령) 증인대질신문>
(김충립씨는 허씨와 대질신문을 위해 참고인으로 나왔으나 본인이 진술의 진실성을 입증키 위해 스스로 증인선서를 했다)
◇김동영 의원(민주) 신문(김 증인에게)
-허 증인을 만난 일이 있나.
▲김씨=아마 이름을 몰랐다 하더라도 얼굴을 보면 그도 기억할 것이다. 첫 만남은 80년5월경 허씨가 중정 부장 비서실장이 된 후 본인이 근무하던 곳의 지휘관에게 인사차 방문했을 때다. 당시 「창조적 민족주의」란 논문을 가지고 와 10 여부를 부탁해 참모들에게 돌린 적이 있다.
두 번째는 80년 8월5일이라 기억된다.
당시 허씨는 미니차트를 들고 지휘관을 방문해 언론통폐합에 관해 얘기했는데 도중에 지휘관이 나를 불러 의견을 얘기해 보라 해 허씨 구상이 일면 긍정할 부분도 있었으나 다른 한 면으로는 문제가 있다고 직감, 「언론규제는 최소한의 범위에서 하는 것이 좋다」는 의견을 제시했더니 지휘관도 수긍하면서 허씨와 나중에라도 같이 의논해 보라고 했다.
허씨가 다음날 플라자호텔에서 만나자고 해 나갔더니 허씨는 안 오고 직원을 시켜 「전두환씨가 대장으로 승진하는 날이어서 못나가니 부대에 가서 기다리라」는 전화가 왔다.
부대로 돌아와 있는데 오후 2∼3시쯤 사령부 상급자에게서 전화가 와 난데없이 자네는 왜 월권을 하는가」「왜 소관 아닌 일에 끼여드나」고 힐난했으며 1주일 후 지휘관이 다시 이 문제를 거론해 그간의 과정을 설명하고 「가만히 있는 게 좋겠다」고 손뗄 것을 건의했다.
-증인이 말하는 당시 특전사 지휘관은 누구이며 힐난전화를 한 상급자는.
▲김씨=정호용 사령관과 허삼수 보안사 인사처장이다.
-당시 브리핑내용과 11월의 통폐합 내용상의 차이는.
▲김씨=대동소이했다.
-주도는 허문도, 실행은 보안사가 한 것 아닌가.
▲김씨=보안사가 모든 것을 했다는데 분노를 느낀다.
◇박석무 의원(평민) 신문
-허 증인은 어제 증언에서 특전사령부 사령관에게는 「창조적 민주주의」에 대한 얘기만 했고 통폐합얘기는 안 했다고 한 것은 분명히 위증이다.
▲허씨=통폐합 얘기는 전혀 없었다.
-허 증인이 위증했다고 생각하는가.
▲김씨=어제 허 증인이 기억이 안 난다고 했다. (웃음)
-허삼수씨도 위증했다. 허 증인은 허삼수씨와 얘기한 것이 분명한데 왜 통폐합문제를 아무와도 상의하지 않았다고 하는가.
▲허씨=언론계에 있는 분들과 상의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허삼수씨에게 이런 식의 복안을 갖고 있다고 했다. 김씨는 「창조적 민족주의」논문을 5월에 보내왔다고 했는데 논문이 완성된 것은 6월말이다. 정호용씨를 증인으로 채택하는 것이 결론을 내리는 빠른 길이다.
◇최각규 의원(공화) 신문
(대질신문 끝나고 허문도씨에게)
-청와대 결재서류에는 1도1사 원칙만 있었다고 하는데 지방보안대 책임자는 어느 틈에 6시에 사장들을 불러 포기각서를 쓰게 했나.
『당시 10월께 권정달 정보처장이 보고한 것에 이미 지방사 통폐합 내용이 있다. 지방사와 비교 안되게 복잡한 중앙사 내용도 내가 했다고 했는데 내가 했으면 왜 아니라고 하겠느냐. 내 안에는 1도1사 원칙만 있었는데 거기다 접목시켰는지 모른다.
-언론 건전 육성방안은 보안사내 언론 대책반 이상재씨가 중심이 돼 만들었다고 했다. 사실인가.
『신문에 난 것과 같은 것이라면 아마 보안사에서 권정달씨가 보고한 것이 아닌가 한다』
-보고할 때 자리를 같이 했나.
『예.』
-그때 자리를 같이 한 사람은
『문공 장관과 이웅희 공보수석, 김경원 비서실장, 노태우 보안사령관 등이다』
-그때 보고서는.
『차트로 보고하고 보고서는 돌리지 않았다. 통폐합 시 각 사 배치를 보더라도 내가 만든 결재서류와 관계없다. 용어를 봐도 보안사에서 만든 것 같다.』
-보도된 이 안은 언론인 해직 뒤에 만들어진 것 같다.
『입안은 7∼8월에 됐다. 그러나 국보위 내에는 이질적인 사람이 많아 언론계에 소문이 퍼지고 로비가 다니고 해 이래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하고 입을 다물었던 시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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