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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서경호의 시선

반도체 위기론보다 더 중요한 것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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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서경호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서경호 경제기획부장

서경호 경제기획부장

“반도체 D램은 예술입니다.”

비상등 켜진 반도체 인력 양성 … 서울대 교수 "암담하다” #‘대기업 프레임’에 갇힌 국가 R&D 투자도 재검토해야

이종호 서울대 반도체공동연구소장(전기·정보공학부 교수)의 말이 귀에 꽂혔다. “구조도 아름다워요. D램 셀의 나노 구조물은 바닥 면적 대비 높이가 부르즈 칼리파 수준이거든요.” 부르즈 칼리파는 과거 ‘버즈 두바이’라 불리던 아랍에미리트의 세계 최고층 빌딩(828m)이다. D램은 계산을 담당하는 중앙처리장치(CPU)에 비해 구조나 회로가 간단하다. 그런데도 경쟁업체가 쉽게 따라오지 못한다. 삼성전자·SK하이닉스의 양산기술이 워낙 뛰어나서다. 이 소장은 “한국 엔지니어의 숱한 시행착오가 반도체 기술 하나하나에 녹아있다”고 했다.

예술의 경지에 오른 한국의 반도체 기술은 ‘반도체 굴기’를 외치며 추격 중인 중국이 눈독 들일 만하다. 황철성 서울대 재료공학부 교수는 반도체 공정과 소자 분야에서 500편이 넘는 논문을 쓴 반도체 권위자다. 그는 지난달 베이징에서 반도체 워크숍에 참석했다가 애를 먹었다. 발표를 마친 그에게 교수와 학생의 질의가 2시간이나 이어졌다. 황 교수는 도망치듯 빠져나와 호텔 방으로 ‘피신’해야 했다. 지난봄엔 중국 지방정부와 중국 반도체 컨설팅업체로부터 “도와달라”는 집요한 구애에 시달렸다. 거액 연봉을 미끼로 한국 엔지니어를 스카우트해온 중국이 이젠 학계에까지 촉수를 뻗쳤다. 그 정도로 절박하다는 거다.

지난주 방문한 SK하이닉스 이천캠퍼스는 ‘독한 현장’이었다. 죽기 살기로 반도체 전쟁에서 승리하겠다는 각오를 날카롭게 벼리고 있었다. 2016년부터 이어진 반도체 슈퍼사이클(초장기 호황)이 머지않아 끝날 수도 있다. 한국 업체가 증설한 라인이 내년에 본격 가동되고 중국이 양산 체제로 들어가면 수급이 나빠져 반도체 가격이 내려갈 수 있다. 중국에서 팔리는 중저 수준의 범용 메모리반도체는 조만간 중국 업체가 차지할 것이다. 중국은 메모리반도체 후발주자지만 설계(팹리스)와 위탁생산(파운드리)은 글로벌 경쟁력이 있다. 반도체 선진국인 대만과의 지리적·민족적 동질성도 강점이다.

하지만 우리의 반도체 일꾼이 누군가. 그 험난했던 반도체 치킨게임에서 살아남은 이들이다. 고통스러운 생존게임의 기억이 조직의 근육으로 남아있다. 하이닉스보다 수율이 높고 생산성이 더 뛰어난 삼성전자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반도체 위기론에 지나치게 민감하게 반응할 필요는 없다. 길게 내다보고 우리의 경쟁력을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 삼성이 말하는 ‘초격차’나 ‘차차차세대 반도체’의 길을 찾는 게 먼저다. 학계 전문가들은 반도체 회사보다 걱정이 많았다. 반도체 양산기술이 앞서 있다고 연구 수준도 선두라고 착각해선 안 된다고 했다. 무엇이 문제일까.

[일러스트=김회룡 aseokim@joongang.co.kr]

[일러스트=김회룡 aseokim@joongang.co.kr]

첫째, 반도체 인력 양성에 비상등이 켜졌다. 황철성 서울대 교수는 “암담하다”고 했다. 서울대 재료공학부 41명의 교수 중에 반도체 전공은 황 교수가 유일하다. 반도체 연구가 성숙기에 들어서다 보니 새로운 성과를 내기가 힘들고, 네이처·사이언스 같은 권위 있는 학술지에 반도체 논문은 잘 실리지 않는다. 그러니 매력이 떨어질 수밖에. 서울대에서 배출한 반도체 전공 석·박사가 2006년 97명에서 2016년 23명으로 10년간 77% 감소했다. 황 교수는 “반도체 전공 인력을 지금의 10배로 키워 우수한 인력이 반도체 회사를 채우고 장비와 재료·부품회사로도 충분히 가야 서로 협업할 수 있는데, 현재는 그럴 여건이 못 된다”고 말했다.

둘째, 국가 차원의 연구개발(R&D)이 ‘대기업 프레임’에 갇혀 있다. 반도체 호황이고 반도체 회사들은 돈 잘 버는 데 왜 굳이 국가 예산을 지원해야 하느냐는 주장이다. 실제로 지난 5년간 반도체 관련 예산은 크게 줄었다. 하지만 박재근 한국반도체디스플레이기술학회장(한양대 융합전자공학부 교수)은 “반도체 관련 국가 R&D 예산은 실제로 대기업이 아니라 중소·중견 장비·소재업체와 대학으로 간다”며 “반도체 생태계 조성을 위해 국가 R&D 예산이 필요하며 자칫하면 4차 산업혁명의 성장동력을 잃을 수 있다”고 걱정했다.

반도체 장비의 국산화율은 20%에 불과하다. 반도체 회사가 수십조원 투자한다지만 상당액이 해외로 빠져나갈 수밖에 없다. 건전한 생태계를 만들어야 반도체 회사가 강해지고 낙수효과도 커지며 산업보안을 다질 수 있다. 백운규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최근 차세대 메모리 소자·소재 개발을 지원하고 한국이 상대적으로 취약한 시스템 반도체 등 비메모리 분야를 육성하는 강력한 산업정책을 펴겠다고 밝혔다. 늦었지만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념에 치우친 ‘대기업 프레임’에 묶여 수출의 20%, 코스피 시가총액의 25%를 차지하는 반도체 산업의 미래를 망치는 일은 없어야 한다.

‘후발주자 중국이 무서운 속도로 쫓아오고 반도체 R&D 예산 등 정부 지원은 갈수록 줄어든다. … 삼성전자 반도체 사람들은 술자리에서 ‘초!격!차!’ 건배사를 외친다.’ 마치 요즘 얘기 같지만 3년 전 언론에 비친 반도체 위기론이다. 반도체 위기론은 언제나 있었다. 제대로 대응을 못 해왔을 뿐이다.

서경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