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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풍기 틀어도 37도 … 쪽방촌 폭염 함께 버티는 ‘진짜 가족’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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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6호 10면

남대문쪽방촌 르포

서울역 건너편은 거대한 빌딩숲이다. 대로를 마주하며 서울스퀘어(옛 대우빌딩)와 서울시티타워 등 고층 건물이 줄지어 있고 그 뒤로도 밀레니엄힐튼호텔과 남산 CJ 본사 등이 빽빽이 들어서 있다. 광화문과 서울시청 주변 건물들로 이어지는 서울 도심의 스카이라인이 이곳에서 완성된다. 서울역을 오가는 수많은 사람과 도로를 질주하는 차량들로 늘 북적이는 곳이기도 하다.

빌딩숲 바로 뒤 514개 방 다닥다닥 #얼음생수도 20분 지나면 다 녹아 #쪽방상담소 직원 6명 고군분투 #직장인 자원봉사 발걸음도 늘어 #“고맙다는 주민들 말 한마디가 힘”

그런데 이 빌딩들 바로 뒤편에 한 평 남짓한 쪽방이 밀집해 있다는 걸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서울 지하철 4호선 서울역 10번 출구를 나와 남대문경찰서 옆길을 따라 70여m만 걸어 올라가면 514개의 비좁고 누추한 쪽방이 번듯한 현대식 건물들에 둘러싸인 채 외딴 섬처럼 자리 잡고 있다. 현대화의 물결 속에서도 서울 한복판에서 반세기 동안 변하지 않고 이어져 온 남대문쪽방촌이다.

살수차 물 뿌려도 15분이면 말라버려

한 평 남짓한 남대문쪽방촌 내부는 선풍기를 틀어도 37도를 웃돌았다. 지난 8일 오후 얼음생수를 들고 자원봉사를 하러 나온 GKL 직원이 쪽방촌 주민에게 손선풍기를 틀어주며 말벗이 돼주고 있다. [김경빈 기자]

한 평 남짓한 남대문쪽방촌 내부는 선풍기를 틀어도 37도를 웃돌았다. 지난 8일 오후 얼음생수를 들고 자원봉사를 하러 나온 GKL 직원이 쪽방촌 주민에게 손선풍기를 틀어주며 말벗이 돼주고 있다. [김경빈 기자]

지난 8일 오후 2시 남대문쪽방촌 입구. 서울 중구청에서 나온 살수차량이 연신 물을 뿌리고 있었다. 구름 한 점 없는 폭염에 달궈질 대로 달궈진 도로를 조금이나마 식히기 위해서였다. “10~20분이면 금세 다 말라버려요. 그래도 이게 어디예요. 고마울 뿐이죠.” 옆에서 지켜 보던 쪽방촌 주민들이 입을 모았다. 정말 15분쯤 지나자 언제 물을 뿌렸느냐는 듯 도로는 아스팔트 본래의 색을 드러냈다.

111년 만의 기록적인 폭염은 취약·소외계층엔 더욱 큰 고통이다. 쪽방촌도 예외는 아니다. 실제로 기초생활수급자와 장애인이 대다수인 남대문쪽방촌 주민들은 살인적인 무더위가 한 달 넘게 지속되는 가운데 바람도 통하지 않는 밀폐된 공간 속에서 선풍기 한 대에 의지해 하루하루를 근근이 버티고 있었다. 에어컨은 언감생심. 이들에겐 곁에서 동고동락하는 쪽방상담소와 자원봉사센터 직원들, 그리고 틈틈이 찾아오는 직장인 자원봉사자들이 유일한 위안이자 희망이었다.

조금 뒤 GKL 직원 10여 명이 얼음생수 1000개와 손선풍기 300대를 들고 쪽방촌을 찾았다. 지난주 인근 보육원을 방문했다가 이곳 주민들의 힘겨운 사정을 전해 듣고는 연차를 내고 또다시 찾아왔다고 했다. 이대영 남대문쪽방상담소 사회복지사의 안내로 골목을 돌며 집집마다 얼음생수 2개와 손선풍기 1대씩 전달하기 시작했다. 한 집 건너 사람이 있었다. 문은 열려 있고 선풍기는 돌아가는데 아무도 없는 방도 눈에 띄었다. 낮에 선풍기를 틀어놓지 않으면 방 안의 공기가 사우나 훈김처럼 뜨거워져 밤에 도저히 잘 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3층 건물의 2층에 사는 김광식(72·이하 주민 이름은 가명)씨가 자원봉사자들을 반갑게 맞았다. 남대문쪽방촌에 거주한 지 12년째. 지난해 결핵에 걸린 뒤론 일도 제대로 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아들이 둘 있는데 몇 년 전에 연락이 끊겼어. 인근 경로당 청소하며 반찬값만 겨우 벌고 있지.” 3층에 사는 이동준(63)씨는 가장 최근에 이곳 주민이 됐다. “병원에서 간병인 하며 살다가 지난해 풍을 맞은 뒤 너무 고통스러워 자살을 시도했죠. 119 구급차에 실려가 목숨을 건지고는 이곳에 오게 됐어요.”

방의 온도를 재 보니 사람 체온보다 높은 37도였다. 선풍기를 틀어놨지만 밖의 기온 35도보다 2도나 높았다. 창문이 있어도 오히려 뜨거운 바람이 들어와 열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했다. 1분도 안 돼 땀이 주르륵 흘렀다. 이 복지사는 “주민들이 방에 있기 힘들다 보니 낮엔 줄곧 골목이나 나무 밑 그늘에 나가 있곤 한다”며 “몸이 불편한 분들은 어쩔 수 없이 방에 있거나 바로 앞 쉼터에 들르는 게 전부인데 쉼터도 자리가 좁아 오래 머물기 힘든 실정”이라고 말했다.

그나마 이 건물은 남대문쪽방상담소가 임차해 운영하는 곳이라 상대적으로 깨끗한 편이었다. 골목으로 더 들어가니 40년 넘은 쪽방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정민성(62)씨는 40대 후반에 허리를 다쳐 장애인이 된 뒤 14년째 도배·장판도 제대로 안 된 이곳에 머물고 있었다. “더워도 너무 더워요. 밤에도 저 좁은 공용화장실에서 물을 서너 번씩 끼얹고 나서야 겨우 잠을 잘 수 있을 정도죠. 냉장고도 없는 데다 반찬값도 만만찮아 식사는 김치와 밑반찬 한두 개로 해결하고요.”

정씨 얼굴에 손선풍기를 틀어주던 자원봉사자 한 명이 ‘외롭지 않느냐’고 묻자 그는 “허…”라며 한숨부터 내쉬었다. “하루 이틀인가요. 먹고사는 것만도 힘든데 외로움 느낄 틈이 어디 있겠어요.” 그러면서 그는 자원봉사자들의 손을 꼭 부여잡았다. “그래도 이렇게 와주는 것만도 너무 고맙죠. 말벗도 돼 주고. 그런데 이 분들이 가고 나면 어느새 마음이 허해지니….” 쪽방을 돌고 내려온 문지현(42·여) GKL 과장은 “쪽방촌엔 생전 처음 와봤는데 발 뻗고 자기도 힘들고 이 무더위에 햇볕도 바람도 안 들어오는 방에서 잘 씻지도 못하시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매우 무겁다”며 “자원봉사의 손길이 더욱 늘었으면 좋겠다. 나도 한 번 더 찾아올 생각”이라고 말했다.

정수현 남대문쪽방상담소장은 “자원봉사하러 오는 분들 거의 대부분이 ‘서울 도심의 고층빌딩 바로 밑에 이런 쪽방촌이 있는 줄 정말 몰랐다’며 놀라곤 한다. 그래도 올해 역대급 폭염에 사회적 관심이 높아져 예년보다 많은 분들이 찾아와 너무 다행”이라며 고마워했다. 유태열 GKL 대표도 “다녀온 직원들의 입소문이 퍼지면서 다른 직원들도 삼삼오오 찾아가겠다고 나서고 있다”며 “회사 차원에서도 자체 예산을 활용해 물품 등을 최대한 지원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주민들 “요즘은 하루가 한 달 같아”

이대영 남대문쪽방상담소 사회복지사(왼쪽)가 주민들에게 건넬 얼음생수를 나르고 있다. [김경빈 기자]

이대영 남대문쪽방상담소 사회복지사(왼쪽)가 주민들에게 건넬 얼음생수를 나르고 있다. [김경빈 기자]

살인적인 폭염에도 쪽방촌 주민들은 우려했던 것보다는 잘 견뎌내고 있었다. 만나는 주민들은 한결같이 “상담소와 자원봉사센터 직원들의 헌신적인 보살핌 덕분”이라며 “그들이 진짜 우리 가족”이라고 했다. 남대문쪽방상담소에서는 직원 여섯 명이 이른 아침부터 현장을 돌며 주민들을 챙기고 있었다. 아픈 환자가 있으면 즉각 119 구급차를 불러 병원으로 옮기는데 요즘엔 하루에 두세 번씩 부르기도 한다. 무더위 쉼터도 오후 10시까지 운영하지만 주민들이 쪽방으로 돌아가려 하지 않아 자정까지 열어두곤 한다. 직원들도 당연히 남아 있다.

정 소장은 “직원들 체력도 감안해 주 52시간을 어떻게든 지키려고 노력하지만 쉽진 않다”며 “특히 직원들이 교대로 근무하는 주말에 상황이 터지면 난감하기 짝이 없다”고 고충을 토로했다. 이 복지사는 “직원들이라고 왜 덥지 않겠느냐”며 “하루에도 수십 번씩 쪽방촌을 돌다 보면 땀으로 범벅이 되기 일쑤지만 주민들이 ‘고맙다’고 건네는 말 한마디에 힘을 내곤 한다”고 전했다.

상담소의 유일한 의료 인력인 이수정 간호사는 지난달 이곳에 합류한 뒤 남대문쪽방촌은 물론 인근 회현동·중림동까지 740명의 쪽방촌 주민을 홀로 챙기느라 거의 하루도 쉬지 못하고 있다. ‘힘들지 않느냐’는 질문에 이 간호사는 “오전·오후에 2~3시간씩 진료하고 나면 파김치가 되곤 하지만 묵묵히 맡은 일을 해내는 다른 직원들에 비하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며 오히려 손사래를 쳤다.

지난 3월엔 쪽방촌 주민 20여 명이 쪽방상담소 직원들을 돕겠다며 자원하고 나섰다. 이름도 ‘쪽빛마을 추진단’으로 정하고 상담소 직원들과 야간순찰도 함께 돌고 아픈 이웃도 앞장서서 챙기고 있다. 이날도 한 기업이 과일 박스를 보내오자 주민 10여 명이 줄을 지어 쉼터로 나르기도 했다.

오후 3시10분. 서울 중구소방서에서도 펌프차가 와서 골목골목 물을 뿌렸다. 지난달 16일 폭염경보가 발령된 뒤 매일 두 차례씩 온다고 했다. 오후 2~4시엔 응급진료소도 운영 중이다. 한 소방관은 “최근 들어 ‘왜 소방차가 쪽방촌에 물을 뿌리며 국민 세금을 함부로 낭비하느냐’는 항의 전화가 여러 통 걸려오고 있다”며 “어려울 땐 조금씩이라도 서로 돕는 게 우리네 인정 아니었느냐”고 씁쓸해했다.

한 시간 반 동안 얼음생수와 손선풍기를 돌린 자원봉사자들은 배웅 나온 주민들과 인사를 나누곤 떠나갔다. 한 주민이 옆으로 다가와 말을 건넸다. “이곳 주민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게 뭔지 아세요? 바로 시간이에요. 시간이 정말 안 가요. 요즘엔 자고 일어나 옆방에서 인기척이 들리면 ‘아직 살아 있구나’ 싶어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곤 한다니까요. 이 생수통의 얼음도 20분이면 싹 녹아 버리고…. 무력감이 몰려 오면 하루가 한 달 같을 때도 많아요.” 얘기를 듣던 주민들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펌프차가 뿌린 물도 그새 말랐다. 모두 떠나가고 쪽방촌 골목엔 다시 적막이 흘렀다. 그늘에 자리 잡은 주민들은 이미 다 녹아버린 얼음생수를 볼에서 떼지 못하고 있었다. 불과 10m 떨어진 서울시티타워와는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 잠시 후 이 간호사와 이 복지사가 쉼터를 나와 쪽방촌 골목으로 향했다. “주민분들 챙기러 가야죠. 어떻게든 이 폭염을 무사히 넘겨야 하지 않겠어요.”

박신홍 기자 jbje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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