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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字, 세상을 말하다] 覇凌<패릉>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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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6호 34면

낯선 단어가 중국을 떠돌고 있다. 무역 패릉주의(覇凌主義·Trade Bullying)란 신조어다. 패릉(覇凌), 중국어 ‘바링’은 우리말로 ‘따돌림’, ‘괴롭힘’, ‘왕따’라는 뜻이다. 영어단어 ‘bullying’의 발음에 뜻이 맞는 한자를 붙인 대만산 외래어다.

시작은 상무부다. “미국의 징세 행위는 전형적인 무역 패릉주의”라는 담화문을 지난달 6일 미국의 340억 달러 관세 부과 당일 발표했다. 이튿날 당 기관지 인민일보가 “미국의 무역 패릉주의가 전 세계에 해를 끼친다”는 평론을 발표했다. 주선율(主旋律) 국가답게 ‘따돌림’ 합창을 시작했다.

중국에서 외래어 번역에는 원칙이 있다. 먼저 뜻이 비슷한 기존 어휘를 찾는다. 없을 경우 뜻을 풀어 의역(意譯)한다. 음역(音譯)은 의역까지 안 될 경우다. 뉴질랜드(New zealand)를 신시란(新西蘭·신서란), 즉 ‘새로운 질랜드’라 부를 만큼 의역 우선주의를 고집한다.

서양에서 교내 집단 따돌림을 일컫는 ‘Bullying’은 ‘괴롭히다’는 중국어 치링(欺凌·기릉), 치푸(欺負·기부)로 번역할 수 있다. 미국을 규탄하려면 패권주의(覇權主義·Hegemonism), 무역 제국주의라는 단어도 있다. 중국은 패릉을 골랐다. 갖가지 해석이 나온다. 패권은 냉전 시대 용어다. 냉전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자는 중국이 꺼리는 말이다. 패권은 가해자를, 패릉은 피해자를 부각한다. 당하는 쪽의 분노·아픔·수치·당혹·공포·우울함까지 담아낸다. 중국이 가련하다는 이미지를 만든다.

‘왕따’는 어른과 아이가 아닌 동급생 사이의 사정이다. 미국이 국력 격차를 좁혀 온 중국을 못살게 군다는 뉘앙스다. 패권·제국주의와 달리 패릉에는 자신을 차분히 되돌아보겠다는 의지도 담았다. 단어 선택에 교훈을 함축하는 『춘추(春秋)』식 미언대의(微言大義) 전통의 부활이다. 미·중 무역 전쟁 발발 한 달이 넘어섰다. 트럼프는 승전가를 부른다. 절치부심(切齒腐心) 중국은 맞관세와 자국 진출 미국 기업 괴롭히기, 업종별 정밀타격에 들어갔다. 승패 판단은 이르다. ‘왕따’ 중국의 호흡 긴 초식(招式)에 주의할 때다.

신경진 베이징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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