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mily리빙] 어린이 성폭력 예방교육 안 해도 탈, 지나쳐도 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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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주부 김모(36.서울 마포구 도화동)씨는 지난주부터 초등학교 3학년인 딸 현아(가명)의 등굣길에 동행한다. 아이가 아침마다 "혼자 다니기 무섭다"며 엄마 손을 잡아끌어서다. 현아는 최근 어린이 성폭행 사건이 연이어 터지면서 집과 학교에서 집중적으로 성폭력 예방교육을 받았다. '낯선 사람과 단둘이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는다''이웃이 몸을 만지려고 하면 싫다고 크게 말한다'등을 교육받는 과정에서 아이의 공포심은 커졌다. 엄마 김씨는 "아이가 길을 가다가도 '저 아저씨 나쁜 아저씨 아니야?'라며 경계한다"며 "아이의 조심성이 지나쳐 노이로제 증세를 보이지는 않을까 걱정"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아이가 성폭력 예방교육을 자연스러운 생활교육의 하나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교통안전 등 안전교육과 병행하라"고 조언한다. 험한 세상에 대한 어른의 걱정이 아이에게 여과 없이 전해지면 현아의 사례처럼 아이가 세상을 불신하게 되는 부작용을 빚을 우려도 크다. 해바라기 아동센터 임상심리전문가 최지영씨와 아하청소년성문화센터 왕강희 교육사업팀장에게 '눈높이' 성폭력 예방교육법을 들어봤다.

# "아이의 책임을 강조하지 마세요"

해바라기 아동센터에 따르면 성폭력을 당한 어린이들이 곧바로 부모에게 피해 사실을 알리는 경우는 38.5%에 불과하다. 대부분의 어린이가 부모에게 사실을 털어놓을 용기를 내지 못한다는 얘기다. 6개월 이상 이야기하지 않는 경우도 34.4%에 달했다.

평소 '조심'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교육을 받은 아이는 성폭력 피해를 본 뒤 '내가 조심하지 않아…'라며 심한 자책감을 갖게 된다. 혹 아이가 저항하지 못해서, 조심하지 못해서 성폭력을 당했다 하더라도, 성폭력은 아이의 잘못이 아니라는 점을 성폭력 예방교육 과정에서 반드시 짚어줘야 한다. 성폭력 피해를 봤다 하더라도 부모는 아이를 야단치지 않고 보호할 것이란 믿음을 미리 심어줘야 사고가 생겼을 때 후유증을 최소화할 수 있다.

# "성 지식 너무 많이 가르쳐 주지 마세요"

성교육이란 명분으로 성 지식을 자세히 전하다 보면 아이의 성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할 우려가 있다. 성 지식은 '딱 아이가 궁금해 하는 것만큼만'해야 한다. 최근 어린이 성교육을 표방하는 책이나 공연물을 보면 성 지식을 지나치게 자세히 전하는 경우가 많다. 아이는 궁금해 하지도 않는데 음경.음순.고환 등 성기의 명칭.위치.기능에 대해 자세히 알려주고 아기가 생기는 과정을 설명할 필요가 없다. 다만 부모가 미리 성교육 방법을 숙지해 놓은 뒤 아이가 질문할 때 바로 대답할 수 있도록 준비한다.

10세 이전 어린이의 성교육은 구체적인 성 지식보다는 '몸의 소중함'을 강조하는 선에서 그치는 것이 좋다. 수영복으로 가리는 곳은 '부모도 함부로 만질 수 없는 곳'이라는 개념을 심어준다.

# "그래도 좋은 사람이 많다고 알려 주세요"

성폭력.유괴 등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길에서 무거운 짐을 들고 가는 노인을 보면 도와 드린다'식의 '도덕교육'은 없어진 지 오래다.

아는 사람에 대한 경계도 심해졌다. 요즘 성폭력 예방교육 현장에선 "집에 어른이 없을 때 앞집 할아버지가 찾아와도 문을 열어 주지 말라"고 가르칠 정도다. 아이들이 세상에 대해, 특히 남자에 대해 불신감과 공포심을 갖게 될 확률이 높다.

아이들에게 "세상엔 좋은 사람, 착한 사람이 훨씬 많다"는 점도 강조해야 한다. "단,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을 겉모습만으로는 구분할 수 없기 때문에 조심해야 하는 것"이란 사실을 분명히 한다.

이지영 기자

성폭력에 대한 잘못된 고정관념

① 여자아이만 성폭력을 당한다

사실은…피해자의 10%는 남자아이. 수치감.분노감이 더 큰 경향을 보이고 모델링의 가능성도 있다.

② 성폭력은 우발적으로 일어난다.

사실은…성폭력 가해자 대부분은 범행 장소와 방법에 대해 미리 계획을 세운다. 같은 수법의 범죄를 반복하는 일도 잦다.

③ 아이가 성폭력을 당하면 뚜렷한 심리적 징후를 보인다.

사실은…아이의 심리 변화로만 성폭력 피해 여부를 알아채기 어렵다. 아이 스스로 성폭력 피해를 이야기하는 것이 가장 확실한 징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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