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출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그날이 되면 벌써 길거리의 낌새가 달랐다. 이른 아침부터 서울 도심과 큰길가엔 나일론 끈으로 줄이 쳐지고 서너 시간 전부터 가방을 든 학생들이 꾸역꾸역 모여들고 멀쩡한 남자들이 길거리마다 서성거리기 시작한다. 무전기를 든 사람들은 무엇이 바쁜지 오락 가락 한다.
학생들만이 아니다. 반상회를 통해 이미 한 동에 몇 명씩 할당된 대로 시민들이 지정된 자리에 나온다. 공무원들이나 일반 회사원들까지도 채워야할 공간이 정해져 있다.
어디서 태극기를 한아름 안고 와서 나누어주는 사람도 있다. 어느새 중요한 길목마다 고교 밴드대가 『선구자』며 『고향의 봄』을 연주하고 있다. 농악대가 꽹과리를 두드리는 것이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다.
물론 거리의 기둥마다 태극기가 펄럭이는 것은 오래 되었고, 빌딩마다 현수막이다, 아치다, 초상화다 해서 얼룩덜룩 도배를 한 것은 며칠전의 일이었다. 나중에 신문을 보면 그처럼 열렬한 「환송」인파는 자그마치 1백만명도 넘는다. 대단한 환호다….
지금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지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대통령이 외국 나들이를 떠나는 날 벌어지는 일들이다. 의장대의 사열은 당연히 있는 일이고 대포가 21발 울리고, 잘 차려입은 남녀 어린이가 꽃다발을 건네준다.
국가원수의 나들이인데 이 정도의 의식과 예절을 갖추는 것이 잘못된 일은 아니다. 어느 나라나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런 프로터콜이 없는 경우는 드물다.
그러나 17일 노대통령은 소리도 없이 뉴욕으로 떠났다. 청와대 현관에서 기자들과 만나 국민에 대한 출국인사를 대신하고 헬리콥터를 타고 공항으로 직행, 특별기에 옮겨 탔다. 비록 공식방문 아닌 실무방문(워킹 비지트)이라고는 하지만 나팔소리 하나 없이 조용하기만 한 출발이었다. 길이 막혀 불법하는 사람도 없었다. 길 가던 사람 붙잡고 대통령의 방미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는 TV의 시민 반응이라는 것도 아직은 없다. 해외교포들, 낯선 외국인의 억지 춘향 같은 코멘트도 아직은 없다.
이제야 나라가 제대로 되어 가려나. 허구의 정치, 겉치장의 정치, 낭비와 허풍의 정치, 국민을 들러리로 여기는 정치가 사라지는 날, 민주주의는 비로소 기지개를 켠다. 그것은 유엔총회의 명 연설보다도 국민의 공감을 더 받을 것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