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도 있는 국민 모습 보이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NBC의 편향보도로 우리의 대미감정이 나빠지고 있다고 한다. 지금까지의 수직 종속관계를 청산하고 평등한 한미관계를 세워가려면 앞으로 상당한 갈등과 마찰을 서로 겪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NBC에 대한우리 언론의 날카로운 거부반응은 보다 큰 한미관계의 배경에서 이해될 수 있을듯하다.
한가지 의문은 우리의 언론이 지나치게 신경질적으로 NBC를 비난하여 국민의 대미감정을 필요이상 자극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만일 우리의 언론이 흥분하여 평형감각을 잃고 있다면 늦기 전에 냉정을 회복해야 할 것이다.
올림픽이 시작된 날부터 열흘동안 미국에서 줄곧 NBC를 지켜본 필자의 인상은 귀국 후에 보고들은 이른바 편향보도와는 상당히 거리가 있었다.
논란의 발단이 된 권투시합의 중계 보도에는 그렇게 엄청난 편향도, 과장도 없었다. 어느 나라의 선수나 코치가 같은 일을 저질렀다해도 똑같이 취급되어야 마땅하고, 우리의 언론도 NBC가 보여준 수준의 역량을 발휘할 것을 기대하고싶다.
문제는 우리가 왜 이 일로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게되었느냐 하는데 있다. 이것은 한미 양 국민의 기질의 차이, 나아가서 동서의 관습차이에서 실명을 찾아야 할 듯 하다.
우리는 유난히 부끄러움을 타는 사람들이고 연대책임의식이 무척 강하다. 우리 가운데 누가 해괴한 짓을 하거나 망발을 하면 나라의 체면이 깎였다고 생각하고, 남이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계속 집적거리면 깊은 모욕감을 느끼고 강하게 반발한다. 우리만큼 걸핏하면 민족감정을 들먹이고, 낯가죽 두꺼운 외국인들을 노엽게 생각하는 국민도 많지 않을 듯 하다.
우리의 이런 기질은 높은 일체감을 바탕으로 한 단결력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편협하고 히스테리컬한 배타성과 결벽증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NBC는 우리를 좋게 홍보하는데 흥미가 없고, 그렇다고 중상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들은 서울에 돈을 벌기 위해 와 있는것 뿐이지만 돈을 버는 과정에서 우리의 성숙하고 발전한 모습을 온 세계에 부각 시켜준 것도 부인할 수 없다.
크게 보아 서울올림픽은 역사에 길이 남을 성공적인 잔치이고,NBC는 우리의 성공을 유감 없이 보도했다고 평가하는 것이 옳다. 만일 우리가 사소한 일에 흥분해 보복적인 인상을 주는 일에 골몰한다면 이를 금도 있는 큰 국민의 주인다운 모습이라고 누가 볼 것인가. 덩치가 커졌으면 속도 그만큼 관후 해져야 할 것이다. 어린 사람들이 버릇없이 건방지게 군다고, 장난삼아 기물을 떼어 갔다고 어른들이 발끈 성을 내는 것은 모양이 좋지 않다.
미국의 한 신문에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렸다. 『개막식에서 미국선수들의 행동은 한심했다. 그러나 선수들이 퇴장할 때 한국의 어린 학생들은 크고 작은 모든 나라에서 온 선수들, 심지어 한국을 강점했던 일본선수들, 한국을 침략했던 중국선수들에게까지 충심으로 우러나오는 따뜻한 우정의 박수갈채를 아낌없이 보내줬다』
심판구타사건 다음날 한 동료교수가 껄껄 웃으며 『한국사람은 손님을 집에 불러놓고 두들겨 패는 사나운 성질이 있는가 보다』하고 놀려댄다. 이두개의 에피소드를 양극으로 삼고 세계 속에 새로운 한국의 좌표가 설정됐다.
우리도 이제는 유장하게 생각하고 행동할 때가 됐다. 남의 나라가 싫다고 그 나라의 국기를 불사르는 우리학생들의 모습을 올림픽이 지난 후에는 다시 볼수 없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